성서적 언약신학 제 10 장 바울 언약 신학의 완성: 로마서 9-11장
 바울은 한 가지 이상의 목적을 위해 로마서를 썼다. 그 자신이 건립하지 않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수에 익숙해지고 그의 스페인 전도 계획에 도움을 청하기를(롬 15:24) 원하였다. 바울은 또한 더 큰 전략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서방 교회가 동방에서 그렇게 된 것처럼1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나누이는 위험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 총회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이 유대 관습과 라이프스타일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이후에도(행 15:19, 22-29),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내부에는 그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164.1)
 로마 교회에서 바울은 그 반대의 위험을 내다보았다. 그것은 그 거대한 이방인 교회는 교회안의 유대 사람들은 열등한 시민으로 간주하고 교회밖의 유대인들은 완전히 선교 대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바울은 서부 지중해 교회에서의 인조적 분리를 막기 위해 근심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에 유대인 그룹과 이방인 그룹 사이에 파벌이 생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롬 11:18; 16:17). (164.2)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그의 마음속에 있던 두 가지 특별한 관심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것은 첫째 교회 내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완전한 동등성, 둘째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향한 선교 봉사의 필요였다.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 선포를 위한 교회의 사명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 이중 부담을 져야 한다고 언급하였다(롬 1:16).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롬 2:11) 하시기 때문이다. 메시아를 약속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바울은 “지상의 모든 사람들”(롬 1:5; 16:25-26 참조)에게 미칠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성취해야 하는 그의 사명을 분명하게 보았다. (165.1)
 예수의 메시아성
 아브라함과 모세의 언약이 다윗 언약에 이르러서야 메시아의 왕권에 대해 완전하게 드러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 대한 바울 신학은 그의 복음 기별의 중심인 “다윗의 혈통”(롬 1:3)으로 나신 예수의 메시아성에 초점을 맞출 때야 비로소 온전한 조망을 할 수 있다. 바울의 바리새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 계신 메시아와의 극적인 만남으로(행 9:22; 26장) 변화되었다. (165.2)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열심이 역사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행동, 즉 메시아 예수를 보내신 것에 대한 그의 무지에 기초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소의 사울에 대한 하늘의 부르심으로 인해 그는 토라의 입장과 메시아의 약속에 관한 그의 모든 유대 신학에 대하여 재고하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하나님을 위한 그의 열심은 더 이상 토라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이 되었다. 그의 회심의 경험 이후부터 바울은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행 9:20)기 시작하였고,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행 9:22; 17:1-3; 18:5 참조)시켰다. (165.3)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롬 5:14)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기독론을 더욱 온전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것은 아담과 그리스도가 모두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이 예수를 구속받은 인류를 대표하는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 15:22-23). (166.1)
 아담의 불순종이 모든 이에게 정죄와 죽음을 가져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은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롬 5:18)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는 아담이 인류에게 몰고 온 파괴보다 훨씬 더 크다. (166.2)
 이 새로운 신학은 이스라엘이 아담의 역할을 완성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유대 전통과 충돌되었다. 랍비들은 “아담은 이미 토라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그 백성의 미래의 소망 안에서 체현되었다”2고 생각하였다. 라이트(N. T. Wright)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부과되었던 사명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다”3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아담-기독론은 또한 “이스라엘—기독론”이다. 그리스도가 누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속하는지를 결정한다. 즉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롬 8:1)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믿음이 “의로 여김을 받은”(창 15:6) 것처럼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롬 4:25, 23)를 의롭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복음 본질적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개신하였다고 선포하였다. (166.3)
 신정론의 문제
 로마서에서 바울은 단지 개인의 구원의 필요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목적도 포함시키고 있다. 로마서 9-11장에서 그는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성취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성경 문단(롬 9-11장)을 바울 서신의 “클라이 맥스”4라고 부른다. (167.1)
 깊은 영혼의 부담을 갖고 바울은 신정론의 문제, 즉 대다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복음을 믿기를 거절한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그의 언약에 신실하신지에 대해 고민한다.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유대인들만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새로운 아담으로 믿는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바울은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행 28:28)고 하였다. (167.2)
 로마서 9-11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후회하심이 없는”(11:29) 선택의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이 역사적 패러독스가 어떻게 아브라함의 후손과 토라의 지혜를 통해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축복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과 조화될 수 있는가?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아간다. 그리하여 로마서 11:25-32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지배적인 은혜의 지혜에 대한 온전한 빛에 이르게 된다.”5 고심하는 사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언약 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7.3)
 바울의 언약 신학
 바울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한 것처럼 이스라엘을 두 부류로 나누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자연인 그대로의 이스라엘과 ”믿는 이스라엘이다(신 30:6, 16-20; 암 5:5-6; 왕상 19:10, 18; 사 1:3-4, 9, 21; 4:26; 6:13; 욜 2:32). 바울은 간결하게 진술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그는 이러한 구분을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약속을 계속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후손 중 오직 일부 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 즉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한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9:7-13). 바울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9:6)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을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가 택하신 자들에게로 긍휼히 여길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9:15; 출 33:14에서 인용). 그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 이니라”(9:16)고 결론을 내린다. (168.1)
 하나님의 긍휼의 주제는 9-11장에 나타난 선택에 관한 바울의 전체 신학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신실하심에 관한 그의 견해는 창조주에 대한 그의 옹호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 (168.2)
 믿음의 부족이 창조주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 멈이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으로 인한 거룩한 선택을 취소할 수도 없다(롬 3:3 참조). 버카워(G. C. Berkouw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스라엘의 ‘선택’의 이유는 사랑이외에는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선험적(a priori) 특성임이 틀림없다. 이 거룩한 선택에는 이스라엘의 ‘공로’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 .선택의 목적에는 그 자체의 구조와 스타일과 확고한 부동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그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았기 때문(9:12)이다.”6 (169.1)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음과 신뢰의 반응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과의 혈연관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무조건적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였다(마 3:7-9; 요 8:33-34 참조).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유익을 주장하는 이런 태도에 맞서(롬 2:25-29),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2-13; 욜 2:32 참조)고 결론을 내린다. (169.2)
 바울은 “주[요엘서에는 ‘야훼’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신학적으로 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골 3:11; 갈 3:26-29과 비교)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인종적 장벽을 제거해 버렸다. (169.3)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 불신 가운데 메시아를 거절하였음에도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추구하면서 약속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이 눈먼 상태를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롬 9:32)다고 하면서, 그것은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롬 9:33)는 예언의 현저한 성취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부딪히는 돌”이신 메시아에게 “걸려 넘어지는 것”아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정적이고 최종적으로 거절한 것은 아니다. (1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