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 않게 하옵소서”(요한복음 4장 15절) (118.3)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장 35절) (118.4)
 길을 찾는 당신을 위하여
 들판을 헤매며 계곡을 더듬는 양들을 위해 길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이런 지경에서 양들이 혼자서 가는 길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빗나간 길이다. 아무리 좁고 험해도 목자가 이름을 걸어놓고 인도하는 길이 옳고 바른길이요, 안전한 생명의 길인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인류의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 고속도로 선언이다. (119.1)
 머리〔理性〕만 믿고 홀로 걷는 인생길은 가나마나 빗나간 길이다. 합리주의자(rationalist)도 그렇고 도덕주의자(moralist)도 마찬가지다. 목자의 길이 의(義)의 길이요,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의인인 것이다. (119.2)
 산다는 것이 불안하고 겁날 때
 참으로 양들이 살기 위해 걸어야 했던 팔레스틴의 계곡과 들판처럼 불안하고 험한 인생 행로이다. 양들의 생명을 노리는 맹수들이 협곡의 바위 틈에 깃들어 있고 강도가 출몰하는, “약탈자의 계곡”, “강도의 골짜기”, 그것 중에 하나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부정적인 감정이 불안이다. 질병, 실패, 실직, 전쟁, 종말에 대한 불안들은 결국 죽음과 직결된 것들이다. (119.3)
 그러나 다윗은 마침내 그 불안을 극복하는 비결을 양에게서 터득했다. 목자이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한 것이다. 무력한 자신이 홀로 있다는 느낌인 불안은 힘세고 선한 목자의 동행을 확신할 때 사라져 버렸다. 근접하는 맹수를 후려칠 끝이 몽툭한 몽둥이와 달려오는 거인 골리앗의 이마라도 명중시킬 수 있는 가죽끈이 달린 장거리 미사일인 물매(投石器), 자신들을 끌어당기는 끝이 굽어진 보호용 지팡이가 목자의 든든한 손에 들려 있지 않는가. (119.4)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 20절). 불안해 에워싸여 두려움 속에 사는 연약한 인간들에게 이 이상 더 확실하고 마음 든든한 인생 행로의 안보 조약(安保條約)이 어디 다시 있겠는가. (120.1)
멀지 않은 주변의 계곡에는 아마도 굶주린 이리와 곰이 넘보고 있을지 모르는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의 배고픔과 피로도 잊은 채 정성껏 밥상을 차리는 세심한 목자를 바라보며 양들은 콧날이 시큰해 온다. 아, 고마운 목자, 참으로 인자한 목자!
(120.2)
 원수의 목전에서 차리는 밥상
 이 곳의 식탁은 떡 벌어지게 차린 부잣집의 잔치상이 아니라 목자가 가까스로 인도한 계곡이나 산여울가의 풀밭인 광야의 식탁이다(시편 78편 19절; 69편 22절 참조). 양들을 주변에 앉힌 목자는 먼저 풀밭을 샅샅이 뒤져 전갈을 잡아내고 독사의 굴을 막아 버린다. 그리고 숙맥들인 양들을 위해 독초를 가려낸다. 멀지 않은 주변의 계곡에는 아마도 굶주린 이리와 곰이 넘보고 있을지 모르는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의 배고픔과 피로도 잊은 채 정성껏 밥상을 차리는 세심한 목자를 바라보며 양들은 콧날이 시큰해 온다. 아, 고마운 목자, 참으로 인자한 목자! (120.3)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어려운 시절, 그래도 애써 푸짐한 식탁을 차리기 위해 정성을 쏟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같다. 당신을 흠 잡아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위험을 무릅 쓰고 생명의 말씀을 먹여 주시던 주님이셨다. 자신의 배고픔과 피로도 잊은 채 광야에 식탁을 차려 허기진 무리를 말씀과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시던 선한 목자, 고마우신 주님이 어머니 모습에 포개져 눈 앞에 어른거린다. (120.4)
 몸이 아프고 마음이 상했거든
 목자가 원수의 목전에서 차린 광야의 식탁에서 포식하고 쉴 만한 물가에서 갈증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중천의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다. 우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벗겨지고 상한 다리를 절름거리며 양들은 콧노래로 흥을 돋우는 목자를 따라 저녁의 안식을 찾아가는 길이다. (121.1)
 땅거미 질 무렵 우리에 이르면 목자는 건너지른 간막이를 제치고 자신이 문이 되어 양들을 한 마리씩 토닥여 헤아리며 우리 안으로 들인다. “나는 양의 문이라 ∙∙∙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한복음 10장 7~9절). (121.2)
 목자는 감람유나 삼대 기름으로 가득 채워진 뿔을 손에 들고 손바닥에 기름을 발라, 발치를 지나는 양들의 상처를 찾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리고 피곤으로 심신이 아픈 양들의 머리를 기름 바른 손으로 쓰다듬어 보낸다. 그러면 양들의 짙은 피로는 순간에 사라지고 짜릿한 충격이 온 몸에 퍼진다. (121.3)
 아, 선하고 인자한 목자! 자신의 피로도 잊은 채 허리를 굽히고 양들의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있는 목자, 그도 상처를 입은 상(傷)한 목자가 아닌가? 잃은 양을 찾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홀로 헤매는 동안 가시에 이마가 찢기고 손발이 깊이 찔렸으며, 옆구리를 상한 목자, 그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로 인간의 상처를 싸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121.4)
 영원한 안식이 그리울 때는
 드디어 힘겹고 고달프던 하루의 행로가 끝났다. 물과 풀과 쉴 곳을 찾아 먼지 길, 돌짝 길을 헤매며 산비탈을 오르던 긴 하루가 목자의 다함이 없는 성실과 인내로 무사히 마쳐져, 지금은 안식을 위해 밤의 여로를 달리고 있다. 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목자! 아, 참으로 선하고 인자한 목자! 다시 콧날이 시큰해 온다.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