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22편 고난을 통하여 보좌로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시 22:15) (205.2)
 바이저(Arthur Weiser)는 이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시편 기자가 자신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며 동시에 그의 고통 가운데 역사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 속에 풀 수 없는 수수 께끼가 있다.” 하나님에 의한 다윗의 굴욕의 깊은 의문은 위대한 다윗이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잃어버려진 바 된 정신적 고뇌를 경험하며 지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갈 3:13). 신약은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음모를 하나님의 손으로 “예정” 하신 계획이라 말하고 있다(행 4:28). (205.3)
 다윗이 배척당함과 절망을 기술한 이 시적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고 있다. (206.1)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6~18)
(206.2)
 여기에서 개인적인 질병 그 이상의 것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옛날에 들개들이 형 집행이 끝난 사형수들의 피를 핥아 먹었듯이(왕상 21:19) 다윗도 자신의 죽음의 열기 가운데서 그의 원수들을 자신의 시신 주변 가까이 에워싸고 이미 손과 발을 뜯어먹기 시작한 개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16절). 그들은 그가 죽기 전에 이미 자기들끼리 그의 겉옷을 나누기 시작했다(18절). 신약은 비록 시편 22편 16절의 그의 수족을 “찌른”다고 하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마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06.3)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 27:35).
(206.4)
 결과적으로 볼 때, 다윗 자신은 형 집행을 당하지 않았다. 주님께서도 어쨌든 마지막 울부짖던 그 순간에 구원에 이 르렀다. (207.1)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 22:19~21)
(207.2)
 히브리 원어에서 21절 마지막 부분을 “주께서 응답하셨고”라는 직설법 현재 완료형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다윗은 여기 자신의 애통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결국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돌연한 구원으로 자신을 놀라게 하셨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불평은 뜻밖에 빨리 끝나 버린 것이다. 그 불평은 이제 감사와 찬송의 능력 있는 간증으로 변한다. (207.3)
 우주적인 감사(22~31절)
 공포의 밤은 구원의 빛과 더불어 끝이 났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다윗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주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서원을 드리기 위해 감사의 예물과 함께 성전으로 나아온다(25절). 그리하여 그는 경배드리는 모든 회중에게 자신의 극적인 경험을 낱낱이 고하려는 것이다(24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는 결코 개인적 헌신의 행위가 아니고 항상 집단적 예배의 살아 있는 한 부분이었다. (시 66: 16, 118:19과 비교). (207.4)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2:22~24)
(208.1)
 이제 다윗은 성소 바깥 마당에서 하나의 축제를 행한다. 그는 화목제를 가져 와서 그 희생의 고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특별히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과 더불어 나눠 먹기를 원하고 있다. 이 축제는 이틀 동안 계속될 것이었다. (레 7:11~16). 그는 자신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구원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208.2)
“겸손한 자(영역에는 가난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 22:26)
(208.3)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에 충실하신 분임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그는 모인 회중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영 광스러운 새 생명으로, 원수들에게는 커다란 놀라움이 되도록 인도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다(시 40: 9, 10; 118:17, 18 참조). 그는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절)라는 말로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다. (209.1)
 리더보스(Ridderbos)는 흥미로운 의견을 내놓았는데, 화목제는 이제 주의 만찬의 표상이며 계시적인 어린 양의 혼인 잔치(계 19:9)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의 고통과 회복을 기념하는 다윗의 화목제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볼 때 심오한 표상적 의미를 지닌다. 다윗이 드리는 감사의 광의적(廣義的)인 목적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이방으로부터 까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여기서 이 시편은 당대를 초월한다. 다윗의 소망은 메시아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209.2)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 28)
(209.3)
 이 시편은 이방인들조차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아올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우주적인 찬양의 이 종말론적 관점으로 다윗은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한다고 하는(창 12:3) 이스라엘이 지닌 사명의 신성한 목적을 재천명하고 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의 왕이시다. 모든 이방은 그들이 그분을 경배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시 66:8과 비교). 스가랴는 재차 단언한다. (210.1)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 실 것이며”(슥 14:9). (210.2)
 경배와 찬송, 그리고 감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땅의 모든 자긍하는 자들”과 이미 땅속에 죽은 모든 사람들에 게까지도 확산된다(9절). 엄격한 문자주의에 입각해서 볼 때, 죽은 자들 즉 땅속에 잠자는 자들(단 12:2)이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인다는 사상은 구약에 부합되지 않는다(시 6:5; 30:9; 전 9:5 참조). 그러므로 앤더슨(A. A. Anderson)은, 시편 22편 29절은 거의 죽게 된 사람들(시 22:15; 30:3)을 말하며, 그 중 좋은 예는 다윗이라고 결론 짓고 있다. 또한 리더보스(Ridderbos)는 “진토에 내려” 간다는 표현(시 22:29)이 실제 죽음(시 30:3, 9; 55:15; 88:4; 143:7)을 뜻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 앞을 내다보는 예언의 영이 이스라엘의 수평적 시각을 넘어서, 다윗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죽은 자의 미래적 부활을 알려 준다(사 25:6~8; 빌 20:10과 비교). 지나간 세대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대가 하나님의 이 요구에 포함된다.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