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22편 고난을 통하여 보좌로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앨렛샤할에 맞춘 노래」 (196.1)
 시편 22편 (196.2)
 이 놀라운 다윗의 시는 상반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통의 노래(1~21절)와, 성전에서 부르는 찬양의 노래로 절정을 이루는 감사의 노래가 그것이다(22~31절). 어떤 비평적인 학자들은 시편 22편을 이름 모를 편집인에 의해 편집된, 본래는 둘 또는 세 개로 된 별개의 노래들을 한데 모아 놓은 시로 결론 짓고 있는데, 과히 놀랄 일은 아니다. 반면, 오늘날 뛰어난 주석가들은 이 시의 내용상의 일치를 확증해 놓고 있다. 애가의 부류에 있어서 애통이나 탄식으로부터 찬양으로의 전환은 이제 전형적인 모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찬양 또는 찬양에 대한 약속은 탄식의 노래에 있어서 하나의 타당성 있는 부분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200.1)
 만일 누가 애가를 “대회 중에”(22, 23, 25절) 드리는 감사의 간증에 따르는 부수적인 노래로 본다면, 시편 22편은 다윗이 처절한 고뇌로부터 구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그리고 모든 백성들 앞에서 받은 그의 새로운 영예와 높임을 인하여 여호와께 찬양을 돌렸으므로 오히려 감사의 노래로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200.2)
 신약은 의미 심장하게도 다윗이 경험한 이 감동적인 전환을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치와 고난,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부활과 하나님의 오른편에의 영광스러운 승천에 적용시키고 있다. 시편 69편과 110편을 제외하고 가장 뚜렷하게 신약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시가 바로 이 시편 22편이다. (200.3)
 오순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사도 베드로는 심히 놀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00.4)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201.1)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극단적인 무기력과 온전히 잃어버려진 바 되는 감정을 울부짖음으로 표현했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시편 기자의 거절당함, 조롱, 죽음의 고뇌에 관한 묘사(1~21절)는 몇몇 주석가들이 볼 때 차라리 “형 집행” 보고서가 아닌가! 그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다윗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정확히 지적해 낼 수는 없다. 다윗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고증 결핍은 데릭 키드너(Derek Kidner)로 하여금, 시편 22편은 단도 직입적인 메시아적 예언, 다윗이 그 속에서 선지자처럼 말하고 있는 “십자가 상의 시편”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했다(행 2:30, 31). (201.2)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시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다윗 자신이 당한 핍박과 질병의 거친 생애에 적용시키고 있다. 다윗은 처음에 사울에 의해 사실상 한 마리의 동물처럼 쫓겼고, 이스라엘 사회에서 배척당했었다(삼상 23:25, 26). 우리는 이 시를 메시아적이라고 생각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표상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리더보스(N. H. Ridderbo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혹한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이 시인의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이 시편의 많은 표현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하나의 통절한 현실로 나타났다”(De Psalmen I, p. 233). (201.3)
 애통과 탄원(1~21절)
 이 애가의 주요 절은 하나님께서 이 시편 기자로부터 “멀리” 계시는 데 대한 울부짖음이다(1, 11, 19절).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다는 느낌은 대적들이 퍼붓는 공포의 공격보다도 더 한층 그의 영혼에 깊은 고뇌를 안겨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구하는 처절한 울부짖음을 방관하시는 듯하다(2절). 그의 믿음이 철저하게 시험받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이스라엘과 맺은 당신의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미쁘심에 대한 확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윗은 오히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품성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202.1)
“이스라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22:3)
(202.2)
 위기의 순간에 토하는 이 신앙 고백은,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승화된 개념으로 자리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찬송의 대상으로서 성소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존재이셨음을 보여준다.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당신의 언약에 변함없이 충실하신 이스라엘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일찌기 이스라엘을 그의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하심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입증하셨다. 다윗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의뢰” 하였다고 세 번이나 언급 하고 있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4, 5절). (202.3)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상기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된다. 지난날 당신의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그의 희망은 새로와 진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앙망하면서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께 매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확실한 상태에 의해 다시 압도되는 순간 그의 믿음은 그의 감정을 억제치 못하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그는 자신을 멸시 가운데서 발 아래 짓밟히게 된 “벌레”와 비교해 본다(6절). 이 겸손과 이사야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고통당하는 종의 겸손함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사 52:4, 53: 2, 3 참조).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맺은 다윗의 특이한 관계에 도전하는 비웃음과 조롱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203.1)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시 22:8)
(203.2)
 바로 이 조롱과 몸짓—머리를 흔드는(7절)—은 훗날 그리스도께서 갈바리 수난의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재차 반복되었다(마 27: 39, 43 참조). 유대인들은 이렇게 비꼬았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그들이 볼 때 하나님 께서 이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고통과 죽음을 상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번영과 최고의 특권으로 그들 이스라엘을 축복하실 뿐이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인가! 다윗은 다시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행위와 그가 줄곧 받아왔던 하나님의 인도, 이 모든 지난날 보여 주신 하나님의 행위 속에서 안전 무사를 구하고 있다(시 22: 9, 10). (204.1)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시 22:10)
(204.2)
 바로 이 믿음이 그에게 자신의 탄원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204.3)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시 22:11)
(204.4)
 그러나 그는 새로 엄습하는 철저한 무기력함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하는 “바산의 힘센 소들”처럼 강하고 잔인한 대적들만 보게 될 뿐이었다(시 22:12, 13, 16). 그것은 그를 완전한 탈진 상태로 이끄는 듯한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 주었다. (2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