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I부 참 지혜 (3:1-18) 7. 거짓 지혜와 참 지혜 (3:13-18)
 하지만, 야고보가 사용한 zēlos라는 단어는 긍정적이지 않다. 긍정적인 질투와 부정적인 질투심 사이에는 세미한 선이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Peter Davids는 “질투는 맹목적 광신, 심각한 투쟁, 혹은 경쟁의 가장된 형태, 결국은 너무나 쉽게 질투심이 되어버린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진리를 위해 질투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은 진리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신랄함, 엄격함, 개인적 교만으로 이해한다”(Commentary, 151). 이것이 정확하게 바울이 악에 대한 그의 여러 가지 목록에서 정죄하는 것이요(롬 13:13; 고후 12:20; 갈 5:20)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다. (166.1)
 두 번째 악은 eritheia(“이기적 야심”, “다툼”)이다. 이 단어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William Barclay는 그 단어가 “원래는 방적업에 고용된 것을 의미했고 여인이 봉사하는 것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로 임금을 받고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그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홀로 행하는 일의 종류를 의미하게 된다. 다음으로 정치에 적용되어 다른 모든 것은 제외하고 오직 사욕을 얻기 위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사용하려는 이기적인 야심을 의미하게 되었다”(91)고 진술한다. 이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것을 “부당한 수단으로 정치적 사업에 대한 사욕을 추구하는 것을”(Davids, Commentary, 151) 의미한다고 나타난다. 야고보서에서는, 다른 신약 성경의 책들과 마찬가지로(예를 들어, 롬 2:8; 갈 5:20; 고후 12:20), 이 용어의 의미가 정치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자신의 관점과 관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비열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수단을 사용하려는 경향”(Ropes, 246)에 대한 것이다. (166.2)
 야고보는 “그것”(3:14)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아야 할 독한 시기와 다툼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한다. 13절“그것”은 아마도 “지혜”를 언급하는 것 같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멈추라고 말하고 있다(분사 와 명령법이 쓰인 헬라어 구문은 그들이 현재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을 멈춰야함을 지적한다): “자랑하는 것을 멈추라. 너의 지혜에 대하여 거만한 것을 멈추라. 진리에 대하여 부인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멈추라. 너는 독한 질투와 이기적으로 분열시키는 야심이 가득찼다!” (166.3)
 그들이 자랑하려고 하는 거짓 지혜는 야고보가 17절에서 특성을 기술할 지혜와 반대되는 것이다. 참 지혜는 하나님 바로 그분으로부터 내리는 은사이다; 거짓 지혜는 아무런 신적인 기원을 갖지 못한다. 야고보는 그 악한 성질을 표현하는 진보된 형용사들 즉,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그것을 특징짓는다(15). (167.1)
 첫 번째 용어, “세상적이요”는 예수께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였다”(요 3:12)라고 말씀하심에서 분명한 것처럼, 헬라어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약 성경의 서신들에서는 그것이 부정적인 면이 함축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열등하고, 불완전하며, 일시적이며, 약하며, 사악한 것으로 언급된다(고전 15:40; 고후 5:1; 빌 3:19). 야고보의 용례는 명백하게 그것에 경멸적이고 사악한 의미를 부과하려 한다. 거짓 지혜는 그 기원에 있어서 어떠한 하늘적인 것도 갖지 못한다. 그 본질은 세상적이다. (167.2)
 두 번째 용어, psuchikos(“정욕적”)는 신약 성경에서 언제나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문맥에서, 그것은 pneuma(“영”)과 대조된다. 대부분의 헬라 철학에서는 인간의 개체를 세 부분: 몸, 혼, 영으로 나누었음이 중요하다. Barclay는 각각을 이렇게 정의한다: “몸(sōma)은 우리의 신체적인 살과 피이다; 혼(psuchē)은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생명이다; 영(pneuma)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며, 사람을 이성적인 피조물이요 하나님을 닮게 하는 것이다”(93). 유대인이었던(그들의 인간관은 전체적이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영과의 관계를 특징짓는 용어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유다는 거짓 교사를 psuchikoi-“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 19)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 용어를 더욱더 널리 사용한 사람은 바울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이 형용사를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그가 지혜(야고보처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때이다. Sophie Laws는 바울의 용례를 잘 요약한다: (167.3)
 바울은, 특별한 영적 이해를 주장하는 고린도인들을 다루면서, “이 세대”(고전 1:20), “육체를 따라”(1:26), “사람의”(2:5), “이 세상의”(2:6) 지혜로써,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2:13)로 제시함으로서 다양하게 이것을 묘사한다. psuchikos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더하게 될 형용 어구들을 묘사한다.... 그것에 대항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1:23f)를, 성령에 의해 가르쳐진, 육(psuchikos)의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성령(pneumatikos)에 의해 받았음(2:13-15)을 그 자신의 설교에서 묘사한다(Laws, 162). (168.1)
 수십 년 후에 영지주의(바울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이단 철학)는 “정욕적인” 사람이란 “특별한 지식과 계몽에 참여지 않고 육(psuchē)의 수준에 남아있는 자, 즉, 단지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세상 질서의 부분으로 살아가고, 동물들의 생명력과 동일하며, 신령한 영에 의해 접촉되지 못하고 단지 그의 지각에만 반응하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쳤다(Laws, 161, 162). (168.2)
 아마 야고보도 “정욕적”이라는 이 용어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거짓 지혜는 그 기원이 세상적일 뿐만 아니라 동물적이다; “그것은 먹이나 개인적인 ‘생존’에 대해 아무런 다른 생각 없이 동물적으로 으러렁거리며 물어뜯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지혜이다”(Barclay, 93). 이것이 정확하게 야고보의 마음에 간직했던 것이든지 혹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정욕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성령이 결여된 것임이 분명하다. (168.3)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것은 마귀적이다(3:15). 이 세 번째 형용사는 거짓 지혜의 기원에 대한 어떤 질문도 그 문을 닫게 할만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마귀에 의해 고무된다. 독한 시기와 다툼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지혜가 하나님에 의해 고취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단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지혜가 마귀의 세계에서 그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한다. (168.4)
 야고보는 이 거짓 지혜를 소유하며 이 독한 시기와 다툼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16절에서 그는 그들의 행동이 끼칠 영향력을 묘사한다: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야고보의 관심은 공동체적인 연합과 화평에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에게 불안정함이 이르게 하고 있다. 그가 요란과 불안정(akatastasia)으로 사용한 단어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애매모호한 말”의 혀로 기술된 1:83:8에서 그가 사용한 형용사의 명사형이다. 첫째는 그의 모든 길은 불안정하다; 둘째는 쉼 없는 악이다. Douglas Moo는 이 단어가 “누가복음에서 parousia[재림] 이전의 기간을 표상할 ‘소란’, 난리와 혁명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눅 21:9).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회집에서 개인의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억제되지 않고, 조직되지 않은 표현을 억제하기를 탄원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는 것을 상기시킨다”(134)고 기록한다. 사실, 야고보서의 이 구절은 단지 혀로 인한 상황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연합과 화평을 파괴했던 고린도 교회의 다른 모든 상황(분열로부터 부도덕까지)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고린도전서를 보라). (168.5)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불화와 악한 행습으로 인도하는 모든 지혜는 거짓된 것이다. 그의 독자들 중에 이 거짓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은 분명히 확인된다: 그들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혼란의 근원이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많은 고통의 원인이다. (169.1)
 참된 지혜가 확인됨
 야고보는 마지막까지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둔다. 시기적이고 이기적인 분위기 속에서 존재하는 거짓 지혜의 부정적인 성질을 개략한 후에, 그는 이제 참된 지혜의 긍정적 특징들을 제시한다. 이 참된 지혜는 먼저 것처럼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지 아니한다. 그것은 하늘의 것이다(3:17). 야고보가 앞서 말한 좋고 완전한 은사들처럼(1:17), 이 참된 지혜는 위로부터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의 근원이라고 강조한 구약 성경의 지혜에 대한 전승과 유대 현자들을 따라간다. 예를 들어, 잠언의 유명한 말씀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곳에서 지혜는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성적 존재로 묘사된다(잠 8:1-31). 휠씬 후에, Jesus son of Sirach은 “모든 지혜는 주께로부터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남아있다”(Sir. 1:1)라는 시적인 문구로 그의 지혜서를 시작한다. 그 책의 중반부로 가면서, 지혜는 “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에서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땅을 덮었다”(Sir. 4:3)라고 스스로 말한다. 야고보가 이 글을 저술하기 약 70년 전에, 이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한 한 유대 현자에 의해 표현된다: “그녀[지혜]는 능력의 하나님의 호흡이며, 전능자의 영광의 순결한 발산이다”(솔로몬의 지혜서, 7:25). (169.2)
 야고보는 지혜의 근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더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을 생산하는지에 있으며, Moo가 지적한 것처럼, 그가 사용한 일곱 개의 형용사의 대부분은 “지혜가 무엇인가보다는 지혜는 무얼 하는가를 묘사한다”(135). 어떤 점에서는, 야고보서의 지혜의 기능은 갈라디아서 5:22, 23의 성령의 하는 일을 한다. 두 구절의 동사들이 약간의 유사성도 있고, 게다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의 본질은 야고보서의 지혜의 특징과 똑같다. 고린도전서 13장“사랑”의 진리와도 같다. 지혜, 성령, 사랑, 이 모두는 하늘의 행동을 일으킨다. (170.1)
 지혜의 일곱 가지 특징이 야고보에 의해 열거되며, 첫째이며 포괄하는 특징은 순결이다. 야고보가 문맥적으로 성적이나 도덕적 순결을 생각하고 있다고 보기는 의심스럽다. 그보다는, 시편과 잠언이 그 단어를 사용한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시편 12:6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를 읽는다; 즉, 순결하고, 참되며, 속임이 없고, 모호함이 없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에서도(아마도 야고보도 주로 사용했던 번역), 현자는 구부러진 자의 길과 대조하여, 의로운 자의 길은 순결하다고 말한다(잠 21:8)! Peter Davids는 “이 순결함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방향을 따라가는 것”(Commentary, 154)을 의미한다고 제안한다. 이 순결은 시기와 이기심에 따르는 부정직함이 없기 때문에, 14절의 다툼과 정확하게 대조된다. (170.2)
 또한 시기와 다툼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참된 지혜의 두 번째 특징인데, 화평이다. 야고보는 18절에서 이에 대해 더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이 태도가 그의 일곱 가지 목록 중의 중요한 한 가지로 강조하기를 원한다. 이 문맥에서 그는 참된 지혜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함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참된 지혜는 그의 혀로나 다른 수단으로 남을 해하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171.1)
 이 목록의 세 번째 특징은 “관용”이다. 헬라어 epiekē의 배경은 이 태도를 가진 사람은 신사적이며, 투쟁적이지 않으며, 분노 중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이 특징은 다음 특징인 eupeithēs(양순)과 동반적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 사람은 투쟁적이고 성내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정반대로 판단력이 개방적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쉽게 설득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잘 속고, 연약하고, 확신이 없고, 어떤 바람에도 쉽게 요동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1:5-8 비교). 그는 다른 사람을 기꺼이 존중하며, 주의 깊게 들으며(어리석게 혀를 사용하는 대신에), 비난 대신에 감수한다. (171.2)
 야고보의 마음에 근접한 태도는 “자비”이다. 그는 여기서 지혜는 “자비와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3:17)고 말한다. 앞서 1:27-2:26의 논의에서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며, 자비의 행동은 자비로운 자들이 맺을 선한 열매들임을 주목했다. 그레코로망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비”“불공평하게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정의한 것을 주목하기는 흥미롭다. 하지만 신약 성경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William Barclay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생각 속에서 eleos는 비록 시련이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일지라도, 시련에 빠진 사람에 대한 자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동정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반사이다; 그리고 그들이 불공평하게 고난받고 있을 때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받을 때에도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시련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건 그의 잘못 때문이야; 그는 스스로 무덤을 팠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어떤 책임도 느끼려 하지 않음”(96, 97)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과 신약의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도 그 같은 태도에 대하여 분명 불만을 표시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비는 받을 가치 없는 자들에게까지 기꺼이 확대해야할 미덕이다. (171.3)
 마지막에서 두 번째 덕성은 편벽치 않은 것이다. 이 단어의 배경 사상은 아무런 편견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의심 없는”, “동요하지 않는”, “하나의 관점을 가진”이라는 사상이다. 후자의 정의가 더 적절해 보이는데, 이 단어 다음으로 목록의 마지막 특징인 “진실함”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특징에서, 강조점은 위선이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 위선적인 경향, 심지어 “교묘함”까지 공격한다. 교묘함에 대한 후자의 사상은 내 소년 시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아난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이 옛날 이야기들은 모든 종류의 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대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는 교활한 거미(아난시)를 그린다. 아난시는 여러 문화에서 영웅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야고보는 아난시 주의를 정죄한다. 그는 진실하기를 탄원한다. (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