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글락으로 돌아와서 생긴 일은 저자로 다윗의 정의감과 공정성에 관하여 좋은 말을 하도록 허락한다. 다윗의 약 200명의 부하들이 지쳐서 전쟁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다윗은 그들에게 “물자”를 지키라 하고 놔두었다. 그러나 승리 후에 다윗의 부하 중 어떤 “악한 자와 비류(匪流)들이” 노획물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22절)고 그들이 말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202.2)
 다윗의 반응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가 되었으며, 다윗이 여호와와 접촉되고, 똑바로 생각할 때에, 그는 훌륭한 통치자가 될 자질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24절). (202.3)
 30장은 저자가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지는 않지만 다시 정치 색을 띠며 맺는다. 25장에서, 정치는 아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서 정치는 노획물을 다윗의 “친구”인 유다의 장로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26절). 이 사람들이 조금 후에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선포할 것이었다(삼하 2:4). (202.4)
 길보아의 저주받은 언덕들 (31:1-31)
 다윗이 아말렉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노획물을 유다의 친구들과 나눈 후에 저자는 우리를 길보아 산 전선으로 데려가 이스라엘이 패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한다. 물론 다윗은 거기서 보이지 않는다. (202.5)
 사무엘상 31장의 사건의 순서는 역대상 10장의 평행절과 같다. 비록 역대기는 늘 그렇듯이 사울이 거절당한 이유를 달고 있다. 사무엘상의 저자는 이스라엘을 실지로 4장의 상태로 끌고 간 연속적인 재난을 그리면서 그것을 바로 말한다.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을 죽이고, 법궤를 빼앗았다. (202.6)
 그것은 정신이 들게 하는 사건들의 목록이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도망한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사울에게 상처를 입힌다. 사울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자살한다. 군대가 도망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한다(31:7). (203.1)
 사울의 몸이 다음 날 발견되었을 때에, 블레셋의 조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이 그의 머리를 베었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사자들을 “블레셋 온 땅에 보내어 그들의 신전들과 백성에게 알리게 하였다”(9절, 「새개정표준역」). 「새개정표준역」의 좋은 소식은 「70인역」의 복음이란 단어를 반영하고 있다. 풍자적이게도, “복음”이라는 그 동일한 단어가 예수의 이야기에서 사용되었다. (203.2)
 사울의 무장과 머리는 블레셋의 신전에 놓여지게 되었다(비교 대상 10:10). 그의 목 없는, 벌거벗은 몸은 자기 아들들의 시체와 더불어 벳산의 성벽에 박혀 있었다. 이스라엘을 위한 유일한 복음의 갸날픈 빛은 밤새 행진하여 가서 벳산의 수치를 끝낸 야베스 사람들의 용감성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시체들을 야베스로 가져다가 그곳에서 화장했다. 그들은 뼈를 거기 묻고 위하여 7일을 금식하였다(31:11-13).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이 그들의 성을 구원한 역사를 기억하였다. 그 사건은 사울로 국가적 주목을 받게 하였고, 결국 그를 왕으로 인정하게 하였다(11:14, 15). 그들의 영웅에 대한 야베스의 최후의 예우의 장면은 처절하며, 이 장면으로 사무엘상은 막을 내린다. (203.3)
 다윗이 소식을 들음(삼하 1:1-27)
 사무엘하의 시작하는 글에서 저자는 다윗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밝혀주는 무대를 설정한다. 첫 눈에 보기에는, 죽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모든 면에 있어서 “바른” 것처럼 보인다. (204.1)
 첫째로, 그는 사울의 부음을 가져온 아말렉 사람의 죄를 따라 갚았다. 다윗의 특별한 호의를 얻고자 그는 사울의 관과 팔찌를 가져오고(10절) 죽어가는 왕의 요구에 따라 “안락사”를 제공했다고 보고한다. 그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31장과 다르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는 전쟁의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오기 전에 사울의 몸을 발견하였다. (204.2)
 비록 아말렉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 할지라도, 다윗은 그가 사실을 말한 것을 “인정”하였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죽인 이유로 다윗은 그 소년의 처형을 명했으며, 구약의 공정한 보수에 관한 상용 문구를 반복하였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16절). (204.3)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애가를 짓고,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한다. 비록 그런 명령의 정치적 의미가 유다와 사울의 집 사이에 다리를 놓는 데 중요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저자는 그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애가는 사울과 요나단을 칭찬하고 있는데, 그 어조는 처절하고 강렬하였다. 비록 요나단에 대한 다윗의 애정은 분명하였지만, 사울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잠식시키지는 않았다. 다윗의 애가의 여러 구절들은 우리의 생각과 어휘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19, 25, 27절); “가드에게 고하지 말며”(20절).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길보아 산처럼 매말랐다”는 표현이 다윗의 저주에 나온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의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21절). 모든 성경 중에서, 길보아는 사울의 마지막 전쟁과 죽음의 비극과 관계하여서만 언급되었다. (204.4)
 다윗의 애가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가? 그가 이중적인 말을 잘한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점이 드러나도록 하였다—물론 교묘하게—다윗은 왕으로서의 자기 목적에 사용할 수 있게 자기의 세력 기반을 세우고 있다: 자기의 아내들(25:39-44), 유다 장로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관습(30:26-31), 이제는 사울의 집을 칭송하는 애가를 유다 사람들에게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 등이다. (204.5)
 다음 장 사무엘하 2장에서의 다윗의 정치 공작은 공공연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그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 대조적으로, 1장에서,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사울을 죽인 것에 관한 언급을 제외하고서는, 다윗의 애가 속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여호와의 이름이 빠진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 대한 저자의 교묘한 비판이 될 가능성은 없는가? 아기스와의 의심스런 관계를 묘사하는 사무엘상 27장29장에서 저자는 역시 한 번도 여호와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윗이 비도덕적인 길로 갈 때에, 여호와를 뒷전에 내버릴 때에, 저자는 그의 묘사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제외함으로 협조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지었을 때에도 계속해서 그와 함께 일하실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주 그가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역사를 볼 때에, 아마도 저자는 왕으로 살면서 여호와와 바른 관계를 맺고 지내는 것이 실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205.1)
 ■ 말씀을 적용함
 사무엘상 24장-사무엘하 1장
 1. 굳게 섬. 내 동료들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의를 위하여 서도록 했던 그런 삶의 결정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가? 나는 그런 결정들을 어떻게 맞았으며, 어떻게 성공했는가? (205.2)
 2. 도움. 내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아비가일과 같은 사람을 보내셔서 내가 악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경우들을 나열하라. 이 목록에 어떤 것들이 포함될까? 그 목록이 길까, 짧을까?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