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여호와께서는 엘로힘을 사무엘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그분의 대변자로 사용하실 수가 있었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사실이 이 해석에 무게를 실어준다. 한 학자는 사무엘상 28장에서 사무엘은 이 여인의 마술적 조작과 관계없이 나타났다고 해석한다: “사무엘은 그 여인을 이긴다. 그는 불러 올림을 당하지 않는다. 자신이 나타난다. 그는 자기의 지식을 강제로 내 놓아야 하는 죽은 귀신(귀신이 그 지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으로 온 것이 아니라, 사울이 그의 맹세로 증거를 삼은 바로 그 동일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로 온 것이다(10절)”(Beuken, 8). (197.3)
 B. 죽은 자의 영역
 어떻게 보면, 구약에서의 죽은 자의 영역은, 그냥 영혼들이 잠자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이라면—어느 정도인지는 아래에서 논의된다—그것은 헬라의 영혼 불멸 사상으로부터는 먼 이야기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정상적인 영역에 덧붙여 마술과 죽은 자를 통한 점술이 이스라엘에서 강하게 금지된 것으로 보아 어떤 종류의 영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의 세계를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의 영역과 같은 것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구약과 함께 그런 영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절대 금지 구역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198.1)
 여호와나 그의 사자는 인간에게 나타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물음을 “꿈이나 우림이나 둠밈이나 선지자로” 대답하실 수도 있었다(삼상 28:6). 그러나 모세의 법은 “신접한 자들”“강신술자들”과의 접촉을 금하였다(레 19:31; 20:6). 이 금지 조항은 사울과 엔돌의 여인에 의하여 잘 이해되었다. 알려진 사울의 법 집행(28:3)이 그 여인이 그 방문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에 경악한 이유이다(12절). (198.2)
 학자들은 무당과 마술에 대한 엄격한 금지를 신학적, 실제적 입장에서 설명한다. 만일 여호와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다면 왜 이스라엘이 그분을 조작하려 하겠는가? 다신교의 종교에서는, 신들이 믿음직하지 못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악한 신들은. 그래서 마술과 주문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일정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은 그런 조작이 필요 없다. (198.3)
 사람이 구약의 (마귀적) “영의 세계”(어떤 경우에도 이것은 금지 구역이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구약은 다음의 요소들로 특징지어지는 죽은 자의 영역에 관하여 분명하고도 일정한 그림을 놀랍게 제시한다. (198.4)
 1.장소: 스올(shé ol [셔올]). 스올은 죽은 자의 영역이다. 그것은 지하 세계 혹은 무덤이다. 영의 분석 성구 사전의 요약에 따르면, 「제임스왕역」은 그것을 “무덤”으로 31회, “지옥”으로 31회, “구덩이”로 3회 번역한다. 구드리크와 콜렌버거의 완벽성구사전에 의하면, 「새국제역」은 그것을 “무덤”으로 55회, “죽음”으로 6회, “깊음”으로 2회, “무덤의 깊음”으로 2회, 그리고 “죽은 자의 영역”으로 1회 번역한다. 구약은 “뜨거운” 스올(혹은 지옥)에 관해서든지 혹은 선인과 악인이 따로 산다든지 하는 구분을 모른다. 모두가 같은 장소로 가며, 같은 조건 아래 있다. (198.5)
 2. 거민: 죽은 사람들(르파임[Repháim]). 「제임스왕역」은 르파임“죽은(dead)”으로 7회, “죽은(deceased)”으로 1회 번역한다. 「새국제역」은 그것을 “죽은”으로 5회 번역하고, 세 개의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것을 더 자유스럽고 오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떠난 영들,” “죽은 자들의 영들,” 그리고 “떠난 자들의 영들.” 더 가까운 번역은 “그림자”이다. 「새개정표준역」은 그것을 사용한다. 죽은 자들은 단지 그들의 이전 존재의 “그림자들”에 불과하다. (199.1)
 「새개정표준역」의 “그림자”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잠언 2:18“방탕한 여인”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녀의 길은 죽음으로 인도하고, 그녀의 길은 그림자들[르파임]로 인도한다.” 죽음과 그림자의 대응을 보라. 이사야 14:9은 바벨론 왕의 지하 세계 도착을 묘사하면서 스올르파임을 함께 말하고 있다: “아래의 음부(스올)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 (199.2)
 3.르파임의 상태: 약하다. 사람의 죽은 상태에 관하여 더 결론적인 구약의 구절들은 죽은 자는 정상적인 지상의 활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가장 분명한 예들 중 하나는 전도서 9:5, 6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分福)이 없느니라.” 이와 비슷하게, 시편 146:4“호흡”이 죽을 사람들에게서 떠나면, “그 날에 그들의 모든 계획이 망하리라”(「새개정표준역」)고 말한다. (199.3)
 그러나 다른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림자들 중에서 피곤한 마디의 고통과 뼈가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을 듣는다. 아마도 대개 시적인 표현일 것이다. 예를 들면, 욥기 14:21, 22르파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스올에 들어간 사람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이사야 14장에서 바벨론 왕이 스올에 도착하는 것에 관한 묘사는 더 생생하다. 같은 구절에서 자연이 기쁨으로 노래하고 레바논의 백향목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으로 표현된 것은(7, 8절) 선지자에게 시상의 자유를 허락하여 스올을 살아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일을 용인하게 한다. 그 동일한 스올“죽은 자들”을 일깨워 왕을 맞게 한다: “그것이 나라들의 왕들을 보좌에서 일어나게 한다. 그들 모두가 네게 말할 것이다: ‘너도 우리처럼 약하게 되었다! 너도 우리처럼 되었다. 네 자랑이 스올에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네 거문고 소리도. 구더기는 네 침상이요, 벌레가 네 이불이로다’(9-11절, 「새개정표준역」). (199.4)
 그러나 그런 “그림자들”은 결코 스올에서 빠져 나와 살아 있는 인간들의 정상적인 세계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8장에서 사무엘의 모양은 르파임(그림자들) 중 하나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엘로힘(신들) 중 하나이다. 비록 사울이 스올에 잡혀 있는 사무엘과 접촉을 시도한 것은 모든 규칙을 깬 것이지만, 하여튼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의 모양을 이용하셔서 사울에게 기별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 기별 속에서도 우리는 죽은 자의 영역에 대한 구약의 개념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사무엘은 말한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19절). (200.1)
 「제임스왕역」의 언어로 한다면, 사울은 “지옥”행이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도 그 같은 결국을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단순히 스올, 즉 무덤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갈 곳이기 때문이다. (200.2)
 죽은 자의 영역(스올르파임)과 신들(엘로힘)의 영역에 관하여 기본적인 이해가 주어졌으니, 네페쉬(nephesh, “영혼,” “생명,” “사람”)와 루아흐(ruaḥ, “바람,” “영,” “생명”)와 같은 다른 주요 단어들이 나머지 그림을 채울 것이다. 구약에서 부활의 소망에 관하여는, 다니엘 12:1-2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잘 발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의 부활의 개념은 구약의 죽은 자의 영역의 이해와 자연스럽게 섞여 있으며, 신약에서는 그것이 매우 분명해진다. 대조적으로, 불멸의 영혼이 몸을 빠져 나와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생각은 구약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 (200.3)
 사방으로 싸움(29:1-30:31)
 사울이 엔돌의 여인을 찾아간 이야기 직후에, 저자는 우리를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려고 준비하는 블레셋의 진영으로 데려간다(29:1). 블레셋 장군들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행진해 오자 놀란다. 아기스는 솔직히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으나 이제는 아기스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1.1)
 그러나 그런 논리는 다른 블레셋 장군들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아기스는 다윗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다윗은 아기스를 향하여 애매모호한 걸작을 하나 만들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8절). (201.2)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시글락으로 돌아오니 다 무너지고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말렉 족속들이 그 성을 공격하여, 값나가는 것은 모조리 취하고 사람까지 잡아갔다. 다윗의 아내들도 잡혔지만, 그렇다고 그가 동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부하들은 그를 돌로 치자고 했다(30:1-6). (201.3)
 이제 다시 여호와께서 다윗의 삶의 능동적인 주연으로 나타나신다. 다윗은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6절). 그리고 그가 제사장 아비아달의 에봇을 통하여 지시를 구하였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가 아말렉 족속을 뒤쫓아갈 것이며, 정녕 성공할 것이라고 대답하셨다(7, 8절). (201.4)
 그는 백성과 시글락에 속한 모든 노략물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이 다른 성에서 빼앗은 것까지 취하였다. 15장에서 아말렉을 멸절하라는 사울의 명령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헤렘의 제한에 붙잡히지 않았다. 그는 약탈물을 챙길 수 있었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