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글락에 있는 동안 다윗은 마적대장처럼 마음대로 사람 사는 곳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음으로 아기스에게 다른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그의 블레셋 주인에게 그가 자기의 유다 땅의 성들을 공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27장의 결어는 역설로 떨리고 있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12절). 도덕적으로 민감한 독자는 누가 누구에게 악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달리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도덕적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단지 다윗이 무엇을 했는지를 그리고, “믿음직한” 다윗에 관한 반어적 증언으로 끝낸다. (193.3)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무엘”(28:1-25)
 저자가, 사울이 엔돌의 여인을 찾아간 이야기로 들어갈 때까지 다윗의 위치는 애매하였다. 28장 초반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계획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중에, 아기스는 자기의 심중을 다윗에게 확실히 알렸다: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1절). (193.4)
 다윗의 잘 준비된 대답은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2절)였다. (194.1)
 “영원한 근위대!”라고 아기스는 선언하였다. 다윗은 그의 백성과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와 충돌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94.2)
 저자는 사무엘의 죽음을 다시 언급하면서 엔돌의 강신술장(seance)을 위한 무대를 설정하고 있다(비교 25:1). 그는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28:3)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다음 몇 줄은 외롭고 공포에 질린 사울을 묘사한다. 자기의 군대는 길보아에 있고 블레셋은 수넴에 들이닥쳐 있는 형편이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28:5, 6). 사울은 홀로 있었다. 쓸쓸히 홀로 있었다. 그의 시종들만 그를 따랐다. (194.3)
 그래서 그는 그의 시종에게 신접한 자를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예전에 무당을 박멸하려던 그의 노력은 철저한 것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시종들이 한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데리고 그는 밤에 길을 나섰다(8절). 후기의 역대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 사울이 무당을 찾아 나선 것은 가장 가증스런 죄 중 하나였다. 사울이 거절당한 원인을 요약하면서, 역대상 10:13, 14“[저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神接)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말한다. 사무엘상 28:6과의 대조점에 유의하라. 거기서는 사울이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라고 말한다. (194.4)
 매끄럽지 못한 타협 중에 사울이 그 여인을 해하지 않겠다고 “여호와로” 맹세하는 아이러니가 생겼다(10절). 그 후에 그는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이 이 늙은 선지자를 보자 큰 소리로 외쳤다. 처음으로, 자기를 찾아 온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12절). (194.5)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13절)라고 사울은 말한다. (195.1)
 그녀의 대답은 엘로힘이었다. 이것은 구약에서 죽은 사람에 대하여 그 단어가 사용된 유일한 경우이다(McCarter, I Samuel, 421). 「제임스왕역」(“신들이 땅에서 올라온다”)은 여기서 복수 분사가 동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엘로힘은 하나님, 신들, 천사들, 혹은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를 일컬을 수 있는 말로서 여기서는 복수로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단수도 복수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28:13에서 처음 나타날 때는 복수형이지만 사울이 그(혹은 그것)의 모양이 어떠하냐고 묻는 14절에서 곧 단수형으로 바뀐다. (195.2)
 그러나 그 이야기는 사무엘의 모양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별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반복이며, 좀 더 날카롭고 더 궁극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울의 죽음과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에 관한 구체적인 예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무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 이름을 일곱 번이나 말한다(15-19절). (195.3)
 사울은 땅에 엎드러진다. 공포에 휩싸였고, 기운이 다 하였다(20절). 여인과 시종들의 강권하는 말 후에야 그 여인이 주는 음식을 먹기로 동의했다. 이 대사는 단순하고 꾸밈없는 말로 끝난다: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25절). (195.4)
 보충 설명: 신들의 영역과 죽은 자의 영역
 엔돌 무당의 요구에 따라 사무엘이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죽은 자의 영역과 신들의 영역을 함께 모아 놓은 유일한 구절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는 인간 영혼의 본질에 관한 전통적인 논쟁의 양편에게 문제가 된다. 한편으로, 엘로힘이 사무엘로 인식될 수 있는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 문단이 영혼 불멸을 지지하는 구절로 사용되기 힘들게 한다. 왜냐하면 몸이 죽을 때 영혼은 그 몸의 속박으로부터 도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혼이 잔다고 하는 전인적(全人的, holistic) 개념을 믿는 사람들(조건적 불멸[conditional immortality])에게 곤란한 구절이다. (195.5)
 이 이야기를 전체적 그림 속에 놓기 위하여 구약이 어떻게 죽은 자의 영역과 신들의 영역을 이해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구약에서 인간의 영역과 초인간적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적 존재(엘로힘)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불가능하였다. 인간은 엘로힘의 영역으로 전환할 수가 없었다-물론 사무엘상 28장이 예외로 취급되지 않는다면. 확실히,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은 창세기 6:1-4을 출발점으로 삼아, 엘로힘의 아들들”이 지상의 여인들과 동거했으며, 나쁜 결과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서라도 주도권은 엘로힘의 아들들”에게 있었다. (196.1)
 사무엘상 28장에서는 두 가지가 가능하다: (1)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엘로힘이 사무엘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2) 죽은 사람이 스올로부터 산 사람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신들의 영역”“죽은 자의 영역”의 주요 내용들을 조사하면 첫째 해석이 더 그럴듯하다. (196.2)
 A. 구약에서의 초인간적 존재들
 1. 엘로힘과 다른 초인적 존재들이 인류와 따로 존재했었다. 구약은 초인적 존재들의 더 광대한 세상의 존재를 인정한다. 금속, 나무 조각, 돌로 된 우상들은 선지자들에 의하여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었으나(사 44:6-20), 엘로힘(혹은 엘로힘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감독 아래 있었던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구약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시편 82편은 두 종류의 엘로힘을 말한다:

 (1) 단수—한 하나님, 한 분으로 한 종류다;

 (2) 복수—하나님께 종속된 선한 신들, 악한 신들. 신약의 우주론은 천사—혹은 권세와 정사—를 말하고, 사단을 그 중에 포함시킬 것이다. (196.3)
 2. 여호와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늘과 땅의 아무것의 모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분 자신은 가시적으로 접촉할 수 있게 나타나셨다. 창세기 18:2에서 여호와는 아브라함 앞에 있었던 세 사람 중 한 분이었다. 창세기 18:16-33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와 더불어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대하여 논쟁하였다. 그리고 씨름의 밤이 지나고 야곱은 그가 하나님(엘로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30)고 놀라면서 말하였다. 더 조심스런 내용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신 것이다. 그 까닭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기(출 33:20) 때문이다. (197.1)
 3.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를 대신하여 나타날 수가 있었다. 비록 여호와께서 친히 가끔 인간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시지만, 그분은 “여호와의 사자”를 자기 대신 보내어, 광야에서 하갈을 찾게 하시고(창 16:7), 발람의 나귀 앞에 서게 하시고(민 22:22-31), 엘리야와 교통하게 하셨다(왕하 1:3).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