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은 다윗의 위기 일발로 끝났다. 바야흐로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26절) 할 때에 블레셋의 공격은 사울로 왕의 의무를 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위기일발은 사울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주요한 특징으로 계속 나타난다. 두 번이나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다윗의 손에 넘기셨다. 이것은 분명히 사울의 위기 일발이지만 다윗의 부하들이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죽이자고 촉구하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다른 종류의 위기 일발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확신을 지켰고, 시험을 통과하였다. (185.1)
 그러나 이 사건들 사이에 끼여 있는 또 하나의 위기 일발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윗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특별한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지혜롭고 아리따운 아비가일을 보내어 막으시려고 했을 때, 다윗은 그의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는 것에 너무 가까이 가 있었다. 다윗은 부끄러움 없이 감사를 드렸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25:32). (185.2)
 다윗은 사울이 죽기 전에 또 하나의 위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거의 그의 백성과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대항하여 전쟁에 나갈 뻔하였다. 비록 저자는 다윗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지만 블레셋의 장군들이 개입하여, 우리가 다윗과 함께 그 딜레마를 뚫고 가야하는 고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29:3-11). (185.3)
 동굴(24:1-22)
 24장에서 사울은 다윗의 위치에 관한 혹자의 제보를 받고 다윗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거의 동시에 저자는 그 사건을 절정으로 끌고 간다. 사울은 동굴 안으로 “발을 가리우러”(3절) 들어갔다. 바로 그 동굴 속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다.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하면서(“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24:4]),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죽이도록 강권하였다. 다윗은 그것을 거절하였으나, 몰래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 성경은 어떻게 사울이 몰랐는지에 관하여 설명이 없다. 아마도 사울이 잠들었을 것이다. (185.4)
 왜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이 다윗의 양심을 찔렀는가? 아마도 옷은 사울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폴친의 사무엘 209를 보라). 사무엘의 옷자락을 찢은 것을(15:27) 여호와께서 왕국을 사울에게서 떼어낸 것으로 사무엘이 해석한 것처럼, 여기서도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은(24:4, 5, 11) 다윗에게는 왕권을 부적당하게 움켜쥐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라를 약속하셨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것을 그에게 넘겨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스스로 나라를 움켜쥘 수 없었다. (186.1)
 사울과 다윗의 대화는 쌍방의 마음이 실려 있다. 다윗은 사울을 “나의 아버지”(11절)라고 부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왕 앞에서 절하였다(8절). 히브리어 동사는 예배 행위를 위한 단어와 동일하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악이나 죄과”(11절)가 없다는 증거물로 제시하였다. 그는 여호와께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결백을 심판하시라고 호소한다(15절). (186.2)
 성경은 사울도 깊이 감동을 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기사에서 우리는 그의 감정이 가짜라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다윗을 “내 아들”이라 부르고 “소리를 높여 울며”(16절), 그는 다윗이 옳았다고 인정하였고, 심지어 다윗이 왕이 될 것도 안다고 말하였다(20절). 마지막으로 그는 다윗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21절). (186.3)
 성경은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라고 말한다. 사울이 집으로 돌아간 것을 보고도, 이 장에서의 저자의 마지막 말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22절)이다. 다윗은 사울이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가 옳았다. (186.4)
 선한 여인, 악한 남자(25:1-44)
 25장은 사무엘의 죽음에 관한 짧은 언급으로 시작한다. 모든 이스라엘이 모였고, 애도하였고, 라마의 그의 집에 그를 묻었다(1절). 28:3의 엔돌의 여인의 이야기에 같은 언급이 반복된다. 사무엘은 떠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두 사람 사이의 중재인도 없다. 그러나 19:18-24에서 사무엘이 다윗을 보호해 준 기록을 제외하고는 성경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윗을 쫓지 못하도록 말린 기록을 전하지 않는다. (187.1)
 다윗은 이제 완전히 로빈 후드(Robin Hood)처럼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었고, 우리의 저자는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이야기는 이중의 기별이 있다: 아름다운 아비가일은 다윗을 위한 여호와의 은혜로운 개입을 의미하였고, 분명 어리석고 정신 나간 나발은 사울을 상징하였다. (187.2)
 비록 시작하는 문단에서, 다윗은 나발에게는 부자를 보호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마피아처럼 비쳤을지라도, 그 뒷 이야기는 그런 인상을 고쳐준다. 나발의 일꾼 중 하나가 다윗은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굽히지 않는 증언을 했다(14-17절). 아비가일이 마침내 준비한 양식을 보고 말한다면, 다윗의 주장은 600명의 장정을 위하여는 약소한 것이었다: 떡 200개, 포도주 2부대, 양 5마리, 볶은 곡식 5말(「새국제역」의 주를 보라), 건포도 떡 100개, 눌린 무화과 떡 200개(18절). 그러나 그 선물이 약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다윗은 아비가일의 은혜로운 개입을 수용했듯이 그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187.3)
 예전의 사건과 대조적으로, 자기의 부하들의 다급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자기의 고결성을 유지한 때와 달리, 여기서 그는 여리다. 그의 감정은 불탔다. 아비가일이 잘 상기시켰듯이, 그는 그의 양심을 무겁게 하고, 미래의 왕의 유용성을 감소시킬 위험에 놓여 있었다(31절). 다윗의 충동은 나발이 “악으로 선을” 갚았기 때문에, 복수하여 쳐부수는 것이었다(21절). 그는 나발과 관계된 모든 남자는 다 멸절시키겠다고 맹세하였다. (187.4)
 “자연적인” 충동은 아비가일에 의하여 또렷이 제시된 이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고, 다윗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이 이야기는 산상수훈의 예수의 윤리는 신약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과 아비가일은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께서 아비가일을 보내사 죄를 짓지 않게 하신 것을 감사하였다(33, 34절). 풍자적이게도,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매력적인 여인이 그를 죄짓게 하였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내셔서 죄를 짓지 않게 하셨다. (188.1)
 다윗과 아비가일이 인간을 통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설명한다면 나발은 반대의 성향을 설명한다. 미묘한 방법으로 저자는 그를 사울을 대신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폴친은 24장의 사울처럼, 25장의 나발도 자비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을 죽이지 않기로 선택한다”(Polzin, Samuel, 210, 211). 아비가일도 기도할 때에 나발과 사울을 연결시킨다: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5:26, 「새개정표준역」). 대사 전체를 통하여, 사울은 다윗에게 악을 행하려고 한다. 24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나의 아버지”(11절)라고 부르고, 사울은 그를 “내 아들”(16절)이라 부른다. 유사하게, 25:8에서 다윗은 나발에게 자기를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다윗에 대한 나발의 말도 사울을 말을 상기시킨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라고 나발이 묻는다(25:10). 이것은 골리앗과의 전장에 나온 “풋내기”에 관하여 던진 사울의 질문의 메아리와 같다(17:56-58). 그리고 나발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에 그는 매우 진리에 가까웠다: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25:10). (188.2)
 나발의 최후는 다윗의 주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주도로 이르렀다(38절). 그리고 사울 왕을 위하여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바로 다음 장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시험)가 왔을 때에, 다윗은 나발과 사울에게 다 해당되는 기분 나쁜 진리를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26:10). (188.3)
 원수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마음을 맞춘 사람들에게는, 나발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불편한 것이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25:39). 그러나 기록된 대로 본다면, 나발의 운명은 구약의 보수의 관념을 생생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부머랭(boomerang)과 같이 죄는 죄인의 머리에로 돌아온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발의 잘못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다”고 말했다(39절). (189.1)
 25장의 결어는 정치적 여운으로 떨리고 있다. 나발의 사후에,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자기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구한다. 비록 저자는 다 말하지 않지만, 갈렙 사람과 관련이 있는(3절) 부자 과부와의 혼인은 유다에서의 그의 입지를 더욱 굳게 할 것이다. 유다의 이스르엘의 아히노암과의 결혼(43절; 비교 수 15:56)도 같은 기능을 하였다. 학자들은 이 아히노암이 동명의 사울의 아내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 한다(14:50). 사울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왕의 아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189.2)
 그러나 사울도 아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사울은 다윗의 아내, 자기의 딸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발디엘에게 줌으로 다윗의 왕권 주장을 약화시켰다(25:44). 사울의 행동의 정치적 의미는 다윗이 사울의 집안과 결판을 낼 때에 미갈이 돌아오는 것을 우선 전제한 점에서 더 분명해 진다. 사무엘하 3:13-16에서 우리는 다윗의 요구로 인해 발생된 고뇌의 장면을 약간 본다. (1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