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 끝에 저고리 앞단주를 떼어서 지그자그로 달고 입으니 허리통이 맞는다. 학교에 가니, 친구들은 영 문도 모르고 “데이꾼와 이쯔데모 어샤레” 즉 정 군은 언제든지 멋장이란다. (222.6)
 4. 후한 대접이었더라면
 돈이 아무리 좋다 한들 사람이 있고 돈이 있게 마련이다. 세 아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잠자리와 식사 대접이 전부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도 고맙기야 고맙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았나 싶다. (223.1)
 너무도 이런 생활이 지겨워서 차라리 신문 배달이나 해보자하고 이 신문사 저 신문사를 뛰어 다녀 보았다. 그러나, 가는곳마다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생들은 호외를 배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223.2)
 여름 방학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보니 눈앞이 캄캄해 졌다. 애지중지하던 의과 서적들이 고스란히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나 없는새에 전당을 잡혔다는 것이다. 해부생리 등 기초 의학서적이니만큼 의과를 공부하는 동안, 아니 일생 동안 필요한 것들이었다. (223.3)
 무슨 대책이 있겠지하고 하루같이 기다려 보았으나 감감 무소식이다. 혹시나 부모가 몰라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으나, 하루는 마님 왈 “학생! 책이 다 없어졌다죠?”하고는 그만이다. 나 역시 내가 가르치던 애의 짓이라 다만 “네”하고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223.4)
 그 책들이 필요할 때마다 도서관 신세를져야만 했다. 좀 후하게 대접해 주었던들-그 대접이라야 용돈 정도이었을 것이지만-그 친절과 후의의 늪에 빠져서 후일 “아니오” 라는 대답을 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23.5)
 남들이 우동집에 들어갈 때 호떡집에 들어가서 2전짜리 호떡 한 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0전짜리 우동 먹는 친구들은 “임마, 사방모 쓰고 호떡집이 무어야!”했다. 사방모에는 호떡 먹지 말라고 써 붙였더냐!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실컷 목욕을 하고 난 뒤의 호떡 한 개는 참으로 별미 같았다. (223.6)
 어느 더운 여름날이다. 친한 호떡 친구 이 군, 심 군과 함께 빙수집에 들어갔다. “너, 돈 있냐?” 하고 물었다. 주머니를 다 털어 놓은 것이 3전 반밖에 안된다. 사방모 쓴 주제에 그저 나가자니 못난 놈들이라 욕먹게 되었고 야단났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것은 다음과 같은 묘안이다. (224.1)
 참으로 웃지 못할 활극이 벌어졌다. “오이 2 전어치 하고 설탕 1 전어치만 갖다 주세요.” 주인은 깔깔 웃었다. 생전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오이가 한 접시, 설탕이 한그릇이다. 뚝뚝 잘라서 시치미를 뚝 떼고 설탕을 찍어 먹었다. 욕 먹을 뻔한 것을 이렇게 모면하고 나니 얼굴이 화끈 단다. (224.2)
 5. 총각이었기에
 방학이 되어 시골집에 돌아올 때마다 해주라는 작은 시골에 딸 가진 엄마들의 군침의 대상이 되었다. 수십 장의 처녀들 사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무척 어리석은 사람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 고생 말고 돈도 있고 문벌도 좋고 어여쁜 처녀를 택해서 약혼이라도 한다면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요 여유 있게 일생의 마지막 학창 생활도 즐기고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서라도, 아니 외국 유학까지도 꿈꿔 볼 수 있지 않을 것인가.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채 굴러 들어오는데 왜 마다 할 것인가. (224.3)
 그러나, 그 많은 처녀사진 단 한 장도 들여다 보지 않았다. 또한, 감사한 것은 부모님들이 내 자유 선택에 맡기고 한 말씀도 강요하시지 않은 것이다. 나 자신이 무척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낭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 성불구자래” 내심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224.4)
 의과 4년, 마지막으로 여름 방학이 돌아왔다. 집에 오니 하루 아침 아버님이 부르셨다. “얘야! 청혼이 들어 왔는데, 네 생각은어떠냐?” “어디서요?” “네가 신세지고 있는 그 댁에서 말이다.” “저는 의향이 없습니다.” 더 묻지 않으시고 “그럼, 거절하지.” 하셨다.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일 처리다. (225.1)
 방학도 어느덧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자, 졸업 시험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4년간 그래도 정들었던 곳을 떴다. 청량리에 방 한 칸을 빌고 이 군과 자취하기로 하고, 리어카 한대를 빌어 짐을 싣고 나가서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왔다. 이군은 사정상 함께 자취 못하게 되니 외톨이가 되었다. 하는수 없이 청량리 사거리 술집에 식사를 부탁하여 아침 저녁으로 신세를 졌다. (225.2)
 얼마 후에, 주인집 부인이 보기에 안되었던지 딸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식사 대접을 받게 되었다. (225.3)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이제보면 장난감 같은 박스카메라, 앨범위원으로서 독립사진관으로부터 선물받은 왕진 가방등 소지품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225.4)
 “아니 선생님이 가져 오라고 심부름 보내지 않으셨어요?” 무엇을 못 털어서 고학생의 하찮은 소유에 눈독을 들였나? (225.5)
 그야말로 빈털털이다. 이제는 이부자리와 쌓아 놓은 노트가 전재산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노트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았는가. 저녁식사 후 뒷산에 오르면, 서울 거리의 불빛이 무엇인가 속삭이며 손짓한다.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그 순간 고달픔을 잊곤 하였다.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