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처부모님은 네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그분들은 수 년 동안 네팔에서 사셨는데 장인은 그곳에서 의사로 일하셨다. 최근에 그분들은 다시 네팔로 돌아가셨다. 일흔에 연세에도 불구하고 11시간을 걸어 희말라야 산맥의 외딴 마을에 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작은 진료소의 휴가가 필요한 젊은 직원들과 교대하셨다. (87.1)
 그 지역 마을들에 의사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진료소로 구름처럼 몰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질병과 상처로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친절한 장인어른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밤낮으로 진료하셨다. 그분은 심하게 지치셨고 그와 같은 자비의 봉사가 자신의 건강을 갉아먹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하셨다. (87.2)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봉사는 그분을 완전히 태워버렸다. 이러한 의미와 함께 다른 의미들이 번제의 희생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87.3)
 완전히 불태워짐
 제사의식을 집전했던 제사장에게 돌아갔던 가죽을 제외한(레 7:8) 번제물은 단 위에서 완전히 불태워졌다(1:8~9).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정확한 상징이다(참고 히 7:27). (87.4)
 기본 제사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하였다(요 1:29).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황소,” “하나님의 수양,” 혹은 “하나님의 염소”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왜일까? 한 가지 이유를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 받을 하나님의 종을(사 53:5)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7절) 같을 것이라고 예언한 이사야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성소의 제사 제도에 있어서 기본적인 제사는 매일 아침에 어린 양 한 마리와 저녁에 어린 양 한 마리를 드렸던 정기적인 번제였다(민 28:1~8). 다른 모든 희생 제사들은 정기적인 번제 외에 별도로 드려졌다.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 부름으로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근본 희생 제물이심을 지적하였다. 마치 이렇게 얘기 하듯이 말이다. “여기에 모든 제사 제도의 역할을 성취시키시는 분이 계신다!” (88.1)
 그분께 지워진 죄
 개인이 드렸던 번제의 첫 번째 동작은 한 손을 짐승의 머리에 얹는 것으로, 누가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고 그 결과로 속죄를 받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레 1:4).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그의 손을 얹는 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그분 자신이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 (88.2)
 대속, 구속
 레위기 17:11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위해 속죄하는, 즉 그들의 생명을 대속하는 희생의 피에 대해서 언급한다. 개인은 죽음 대신에 생명을 의미하는 피를 속전으로 지불하는 희생 제사를 드렸다. 여기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기 때문에 확실히 그 피가 죄된 인간들을 위한 속전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뚜렷이 나타난다(벧전 1:18~19; 참고 마 20:28; 막 10:45; 딤전 2:6). (89.1)
 많은 성경 구절들이 “구속”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가 성취한 일과 관련해서 사용한다(예: 엡 1:7; 고전 1:30). “구속”이라는 말은 분명히 법정 개념이다(참고 레 25:25). 주기도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베풀어주시는 용서의 표현으로 사용된 ‘빚을 탕감해준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마 6:12). 여러분이 만일 빚이라는 것이 법적인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여러분의 대출 서류를 한 번 읽어보라. (89.2)
 우리의 생명을 위한 그분의 생명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속이나 구속의 값은 그분 자신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온전한 생명을 우리 죄인들의 생명을 위하여 내어주셨다. 짐승의 희생 제물이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레 1:3; 22:17~25)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셨다(히 4:15). 그러나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허락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대신에 죽으셨다(사 53:5, 10). (89.3)
 다윗왕은 자신의 인구조사 명령으로 계수되고 이제 곧 죽게 된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자신에게 돌릴 것을 요청하였다(삼하 24:17). 그리스도께서는 요청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셨으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사 53:12). (90.1)
 고린도후서 5:21은 이보다 더욱 강력하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상상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셨다. 그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살았던 수 십억 명의 사람들의 모든 악한 정욕들과 이기적인 타락의 짐을 지셨다. 그분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홍수를 자신에게 모으셔서 자신을 모든 죄악의 화신(化身)과 동일시하시고 자기 자신을 파멸에 내어 주심으로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을 씻어내셨다. (90.2)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죄를 짓고 형벌을 받아 독사들에 물려 죽은 때를 언급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형상을 만들어 독사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장대에 매달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살 수가 있었다(민 21:8~9). (90.3)
 뱀의 형상 그것 자체만으로는 한 사람도 치료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술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상징을 쳐다봄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치료하신 것이다. (90.4)
 어떤 상징인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뱀의 모양과 동일시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높이 들리셔서 죄인들의 궁극적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셨다. 그분은 단순히 뱀에 물린 것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91.1)
 왜 예수님께서 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며 최초로 인류에게 죄를 들여온 사단(창 3)을 생각나게 하는 뱀으로 나타셔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의 죄악과 동일시 되도록 허락하심으로 죽음으로 그 죄악을 소멸하시고(참고 히 2:14), 그래서 우리가 바라봄으로 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