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9 장 옛 언약에 대한 바울의 변증
 바울의 첫 번째 관심은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참된 사도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바울은 그가 한 일 그 자체로 말하고 싶어 한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복음 사역의 “인증”이다(고전 9:2). (156.3)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읽을 수 있는(고후 3:2)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록된 그의 살아 있는 계명의 “편지들”이라고 주장한다(고후 3:3). 바울의 새로 기록된 “돌비”의 은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신자들의 심령에 새기어 그들과 맺은 거룩케 하는 교제를 새롭게 하신다는 예레미야의 언약의 약속렘 31:33)을 반향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은유는 하나님께서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겔 11:19; 36:26과 비교)리라는 에스겔의 약속을 좀 더 잘 반영한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뜻을 돌비가 아니라 “육의 심비”에 쓴다고 말한다. 분명히 문제는 “마음”이다. 즉 신자의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법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156.4)
 고린도 신자들은 기꺼이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새롭고 민감한 마음의 새 언약을 경험하였다. 그들의 변화된 삶은 모든 이들에게 바울의 사역이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부여하시고 성령께서 기록하셨다는 가시적인 증거가 되었다. (157.1)
 바울은 모세 언약에 대한 유대인들의 직분과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직분을 예리하게 대조함으로써 예증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성령의 복음 사역을 율법 준수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노력과 대조하였다. 고린도후서 3:1에서 4:6의 주요 주제는 근본적으로 그의 사도 직분과 권위에 대한 방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교리를 완전한 규모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다만 그의 사도 직분의 더 나은 효율성을 예증으로 설명하기 위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직분을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각 교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록된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로 간주한다. “성령의”(고후 3:6) 일꾼으로서 바울은 그의 하늘 신임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157.2)
 논쟁이 된 본문: 고린도후서 3:6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의 일꾼 중 하나가 되는 권능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그는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복음 사역을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며 오직 “없어질” 모세의 얼굴의 영광만을 가지고 있는 “옛” 언약의 직분(고후 3:7-8)과 비교한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왜 바울은 비록 “영의 직분”이 의롭게 하기에 영광이 더욱 넘치지만(7-9절), 그래도 그 영광의 광채로 이스라엘이 쳐다보지 못한 모세 언약의 직분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였는가? 바울은 여기서 생명을 주는 성령이 없는 “의문의” 봉사를 하는 모세 언약을 취급하고 있다. (157.3)
 이것은 토라 그 자체로도 분명해 지는 것처럼 모세 언약에 대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 아니었다. 모세 자신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신 30:6; 14절도 보라)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지 모세 언약을 율법의 “문자”의 봉사로 전락시킨 바리새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날카롭게 대조하면서 그의 복음 사역은 신자의 심령에 지속하는 선물로 “더욱 영광스러운” 의와 하나님의 성령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그는 주께서는 영이라고 선언하였다(고후 3:17). 그는 영혼의 안식을 찾아 의를 낳고자 수고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그 때 신자는 “주의 영광을”(18절) 보게 된다. (158.1)
 바울은 그와 같은 법은 생명과 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자를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로마서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되나니”(롬 4:15)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 법 그 자체는 단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다(롬 3:21, 23). 그리하여 악한 양심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정죄와 심판을 느끼게 한다(롬 6:23). 그는 선과 죽음을 가져오는 십계명의 기능에 대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10)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고 결론을 내렸다.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와 지도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십계명은 결코 죄인에게 은혜를 줄 수가 없다. (158.2)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도록 권능을 베푸는 생명을 주는 성령을 가져온다. 모든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편 1, 19, 40, 51, 그리고 119편에서 확언하고 있듯이(제4장 참조) 그와 같은 새 언약의 경험을 향유한다. (159.1)
 바울은 그의 직분을 신령과 의의 직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가져오고(롬 8:1, 33-34),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헌신한 거룩한 생명을 추구하고 싶은 동기를 부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없이 율법에 의해 지배되던 자기 시대의 모습을 모세 시대의 낡은 성격으로 강조하기 위해 “옛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159.2)
 칼뱅이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말씀과 성령” 장에서 고린도후서 3장에 대해 의미 있는 해석을 제공하였다. (159.3)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의] 문자는 죽은 것이다. 주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곳에서 그 독자들을 죽인다(고후 3:6). 그리고 마음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 채 단지 귀에만 들린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진실로 그것이 가슴에 새겨지면, 그리스도를 나타내면,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 우준한 자로 지혜롭게”(시 19:7) 하는 생명의 말씀이다(빌 2:16).16
(159.4)
 칼뱅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하여금 “상호 유대” 속에 그분의 말씀과 연합하도록 그의 성령을 보내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당한 존중과 위엄이 말씀에 주어질 때만 성령은 그의 권능을 행사하신다”17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떠난 율법을 권하는 ”18 거짓 사도들을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버카워(G. C. Berkouwer)도 율법이 복음에서 분리되어 구원의 길로 선포될 때 문자는 죽인다.고 말함으로써19 고린도후서 3:6에 대한 칼뱅의 이해를 확인하였다. (159.5)
 바울은 그가 효과적으로 “생명을 주고” “의를 가져오는 성령의 ”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았다고 주장한다(고후 3:6, 9).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고후 4:6) 받는다. 바울은 모세나 모세 언약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거짓 사도들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출 34:30)할 때에 그의 얼굴의 광채를 덮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같은 수건을 두르고 ”구약을 읽는 자들이었다. 바울은 구약을 읽을 때에 “오늘까지” 그것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수건이 그 마음을 덮고 있다고 썼다(고후 3:15). 그러므로 그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만이 구약에 대한 영적 이해를 준다. (160.1)
 고린도 교회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기보다 율법에서 비롯된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의 반대자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옛 언약 준수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160.2)
 좀 더 특별하게 표현한다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 그 자체를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에서 분리시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율법은 지상 성막 안에 돌비에 새겨진 것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는”(고후 4:4) 이 눈먼 상태가 바울이 그렇게 강하게 이제 “그리스도의 얼굴”(고후 4:6)에 나타난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빛나던 “영광”보다 뛰어나다고 강조한 이유이다. (160.3)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시내 언약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절하 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결코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경시하는 방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롬 9:4 참조). 역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의의 율법을 주실 때의 그 영광스러운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고후 3:7)다고 진술하였다. 바울은 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의 우월한 영광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명을 주는 관계를 가져 온다. 그것은 그리스도 없는 율법 언약에 있는 정죄와 죽음보다 무한히 더 좋은 것이다(9절). 요약하면, 바울은 초기 유대교에서 실행되고 있던 옛 언약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의 추상적인 의문의 직분이었다. (161.1)
 그리스도를 닮는 것의 새로운 표준
 바울은 출애굽기 33-34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 밤낮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한 후에 그의 얼굴에 사람이 바라볼 수 없는 광채가 있었다고 상술하면서 훨씬 더 극적으로 대조를 전개하고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의 거룩한 “영광”을 보여달라 고 구했다(출 33:18).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본질적인 성품인 동정과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셨다(19절). 그러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 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절)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틈에 숨기시고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인 새로 기록한 십계명 복사판을 그에게 주셨다(출 34:28). (161.2)
 바울은 출애굽기 34:29-35의 이 구절을 그의 눈 먼 반대자들에게 적용시켰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 후에 그 들의 의식적인 죄악과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인해 얼굴에 수건을 가리라는 요구를 받았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였더라면, 모세의 얼굴에 있는 하늘 영광은 “그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였을 것이다.” 죄에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20 (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