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9 장 옛 언약에 대한 바울의 변증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이삭의 후예는 할례를 받아야 되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이스마엘의 계열에 있다는 자기들 교훈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10 바울은 아브라함 언약에 그리스도 중심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모세 이야기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뒤집고자 하였다. 그리고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결론을 내렸다. (151.3)
 그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태어난 자들이며, 그 성령은 이삭을 낳기 위해 사라에게 임하셨고 이제는 이방인 신자들을 낳기 위해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임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참 “어머니”는 예루살렘 모교회가 아니라 위에 있는 자유자 예루살렘이다(4:26). (152.1)
 마튼즈는 “바울는 사도이다. 그것도 어떤 지상 교회, 특히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다”11라고 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신자들은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할례 없는 선교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태어났다. (152.2)
 이스마엘이 성령으로 태어난 아들을 “핍박하였다” 창세기 21:9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석적 전통을 이용하면서 바울은 “이제도 그러하도다”(4:29)고 선언하였다.12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교란자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30; 창 21:10과 비교). (152.3)
 그러나 바울은 이삭의 신분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창조적인 권능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바울은 이 개념을 로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7-8). (152.4)
 이사야에 근거한 바울의 논증
 바울은 이사야 54장의 새 언약의 약속은 이제 그의 복음 사역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사야는 고통받는 예루살렘 도성이 비록 그 당시는 사라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포로 생활로 인해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하지만” 미래에는 큰 번영을 경험하고 많은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노래하며 기쁨으로 외치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의 종말론적 예언을 시작한다(사 54:1-3). 그런 변화가 도래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인 야훼가 그의 확고한 “평화의 언약” 안에서 영원한 동정심을 갖고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친히 이스라엘을 다시 그에게로 이끄시기 때문이다(사 54:5-10). (153.1)
 이제 바울은 이사야의 언약의 약속을 그것의 성취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에 적용시킨다(갈 4:27). 바울은 그 실현은 이제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하늘의 새로운 시민으로 거듭난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다고 주장한다(4:29). (153.2)
 리더보스는 “바울은 이 [이사야 54:1]의 약속의 성취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임에서 찾는다. 그것은 오직 유대인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요. 이방인 가운데서도 나오는 모임”13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복음의 증인들로 다시 주장하고 있다. 그는 속임을 당한 교인들을 질책한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153.3)
 바울에게는 교회란 하나님의 영의 새로운 창조였다.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 여기에는 사도가 앞에서 했던 5:6의 진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 반복되어 있다. (154.1)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한 가지만 의미심장하게 바꾸어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바울의 세 확언들을 나란히 하고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3)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 (154.2)
 이것을 함께 묶으면, 이 세 진술은 바울이 거듭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도덕법을 폐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종노릇의 멍에로 여기지도 않았음을 확인해 준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명하게 공언하였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154.3)
 갈라디아인들을 위한 바울의 주된 부담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순종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갈 6:15), 곧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갈 4:19) 졌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그 자신의 경험이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목회적 평가에 동의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이루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14 (154.4)
 고린도 교회의 위기에 대한 바울의 반응
 바울이 고린도에 교회를 세운 이후(행 18:1-6), 그는 글로에 집의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분쟁 가운데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전 1:11-12). 그는 고린도로부터 예배와 바깥 세상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대한 충고와 안내를 구하는 편지를 받았다(고전 7장).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첫 번째 편지로 응답하였다. 그리고 바울에 대해 개인적인 공격을 시작한 주모자의 선동 아래 심각한 위기가 고린도 교회에 닥쳐왔다(고후 2:5-11; 7:8-13). (155.1)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울은 교회 앞에서 굴욕을 당한 짧지만 “고통스러운” 고린도 방문을 가졌다(고후 2:1). 그리고 그는 이 위기를 다루기 위해 “엄한” 편지, 아마도 고린도후서 10-13장에 보존되어 있는 편지를 썼다. 그 후에 디도가 바울에게 반역이 끝났다고 보고하였다(고후 7:6-16). 그 때 바울은 아마도 고린도후서 1-9장일 것이라고 믿어지는 다른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AD 57년 디도편에 마케도니아로부터 고린도로 보내어졌다. (155.2)
 고린도후서 3장은 기독교 언약 신학에서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혹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언약을 선포하셨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심지어 십계명과 제칠일 안식일도 폐했다는 것이다. 바른 이해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헬라의 고린도에 위치한 당시 교회의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155.3)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유대 기독교 교회 지도자들의 추천서를 지참하고 예루살렘에서 올라 온 몇몇 주제넘은 전도자들의 선동으로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완전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모세와 율법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갈라디아에 있던 자들과 흡사한 유대화 된 파당”15일 것이리라고 짐작하게 해 준다. (155.4)
 이 라이벌 전도자들은 바울을 사도적 권위가 부족하며 그 자신이 만든 복음을 전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원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바울은 자신에게 신분과 권위를 부여하는 어떤 공식적인 “목회 신임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고발들이 심지어 바울 자신이 AD 51년과 53년 사이의 일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조직하였을 때에도 고린도 교회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행 18:1-8 참조). (156.1)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이 바울이 참된 사도라는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바울은 교회에 분란을 일으킨 거짓 고발자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2장에서 그들을 역설적으로 “뛰어난 사도들”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바울 사도권의 적절성뿐만 아니라 2:17에서 4:6에 이르는 그의 복음 기별과 주제의 신뢰성도 문제가 되었다. 바울은 모세를 높이는 어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생긴 분란에 대해 고린도교회에게 경고하고 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고후 11:13, 22-23). (1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