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9 장 옛 언약에 대한 바울의 변증
 우리는 바울 서신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갈라디아서 4:21-31고린도후서 3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들은 모세의 언약을 행위의 언약, 즉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의 언약,”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언약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146.1)
 물론, 우리는 각 구절을 그 자체의 직접적인 문학적 역사적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는 “해석자는 저자의 문서를 처음 듣고 읽은 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물어야 한다”1는 고전적인 규칙을 따르고자 한다. 우리는 바울의 좀 더 초기 서신인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바울의 이 서신을 하나의 단위로 읽을 때 가장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146.2)
 갈라디아에서의 복음에 대한 위협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서신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신약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연대가 앞 설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늘 기독교 구원의 기초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의 본질적인 것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 서신은 기독교 신학의 시금석이다. 헤이즈(Richard B. Hays)는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십자가, 성령의 권능, 그리고 그리스도인 자유의 의미 등에 관한 모든 이어지는 기독교 신학적 사고의 원천이다”2라고 하였다. (146.3)
 이 서신은 공식적인 신학 논문은 아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종교적인 위기의 순간에 처한 특수한 교회에게 주는 목회 서신이다. 바울은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로부터(갈 4:8-9)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 1:2; 행 13:14-14:23과 비교)을 형성하였다. 그가 떠난 이후에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복음을 가르칠 훈련된 교리문답 “교사들”을 남겨두었다(갈 6:6).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이 바울에게 어떤 유대-그리스도인 여행 전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도착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의 구원 언약의 온전한 일원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들 생활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다른 복음”(1:6)을 전하기 시작하였다는 전갈을 보냈다(5:2-4; 4:10; 6:12-13). (147.1)
 헤이즈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들은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유대 교훈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복음을 확대하고자 시도하였다.”3 갈등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 대한 두 부류의 초기 기독교 전도사들 사이에 있었던 기독교 내부의 논쟁이었다. 사도는 회당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 않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요란케 한”(1:7) “거짓 형제”(2:4)들을 비난한다. (147.2)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 교회”로부터 온 “교사들”에 의한 그의 복음의 변경을 복음의 변질이나 왜곡으로 부른다. 이러한 라이벌 전도자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론지넥커(R. Longenecker)는 “모든 가능성을 놓고 보면 그들은 야고보가 공식적인 지도자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엄격한 율법준수 그룹의 일원이었을 것이다.”4 (147.3)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부적절한 사용
 갈라디아에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바울의 부담은 그들이 그들의 “마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얻고 그의 영을 받고자 모세의 의식법을 지키기 시작하였다는 것, 간단히 말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구원의 후사가 되기 위해서 할례와 유대인 생활 방식을 지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유대 기독교 전도자들을 사로잡은 교훈은 분명히 아브라함 언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할례가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된다는 것과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적법한 자녀와 후사가 되기 위해서는 토라에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본성적인 악의 충동을 이기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48.1)
 이러한 라이벌 전도자들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의식적 준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 신학에 대한 것이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더 나아가 바울은 율법 준수가 이방인들 사이에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귀결된다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갈 3:2, 5). 마튼(J. Louis Martyn)은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설명하였다. “그들[갈라디아의 경쟁적인 교사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율법을 보기보다 하나님의 법의 빛으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에 부차적이었음을 의미 한다.”5 란지넥커(Longenecker)에 따르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차적인 지위가 그들의 기별이 “온전한 구원을 위한 율법주의와 그리스도인 삶을 위한 명목주의 중 하나”6인 이유이다. (148.2)
 토라에 근거한 바울의 역공
 바울은 이제 “율법 아래 있고자”(4:21)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려고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1:6-9)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바울에게는 “율법 아래 있다”는 표현은 해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4:5; 5:18) 갇힌 상태, 종된 상태 혹은 매인 상태(3:23; 4:25)를 의미하였다. (149.1)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토라로부터 교훈을 배우라고 도전한다. 그것은 그들의 율법에서 비롯된 사고방식과 명목상의 라이프스타일을 교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배운대로 다시 그리스도와 그분의 토라 해석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그는 그들에게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4:21)고 묻는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이란 용어를 분명하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모든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참 이스라엘에 대하여 모세와 이사야로 부터 가져 온 몇 구절을 해석함으로써 토라에 대한 바른 사용을 보여 주려고 한다. (149.2)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리고 여종 하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특별히 그는 여기서 창세기 16-21장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아들들의 출생에 초점을 맞춘다. 사도는 이방인들에 대한 두 종류의 기독교 선교, 즉 예루살렘에 있는 “모 교회”의 할례당에 의한 전도와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독립적인 전도를 포함한 당시의 갈등에 대해 몇 가지 놀라운 적용을 한다. (149.3)
 아브라함은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4:21-22). 바울은 각각의 아들이 태어난 다른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났고, 다른 하나는 “약속으로 말미암아”났다(4:23). 바울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아들들의 두 어머니는 “두 언약”“비유”“묘사”라고 하였다. 이 결론은 사도 자신이 소개한 새로운 것(novum)이었다. 왜냐하면 창세기 16-21 장의 이야기는 사라와 하갈을 통한 두 다른 언약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하갈 언약이나 시내 언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150.1)
 이 사실은 바울이 갈라디아의 현재 상태에서 창세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도 교회에 모세 언약에 대한 잘못된 사용, 즉 시내 언약을 구원을 얻기 위한 의식 언약으로 바꾸는 시도가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세 율법의 의식 준수에 노예가 되게 하는 왜곡이었다.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 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을 오도하였다. 왜냐하면 시내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을 갱신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제 3장 참조). 바울은 이 모세 언약에 대한 이러한 왜곡을 “하갈”관계로 불렀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하고”(갈 4:24-25). (150.2)
 바울은 여기서 시내 언약을 이스라엘을 “종 노릇”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물론 그것은 애굽의 종 살이에서 이제 막 건져 낸 하나님의 목적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이 가짜 모세 언약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적당한 과정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임이 명백하다. 헤펜스톨(Edward Heppenstall)이 바로 지적하였다. (150.3)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소망없는 행위의 언약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고, 마지막 자유의 흔적마저 빼앗아 끝내 영적 속박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민족적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낸 후에 그들을 팔아넘기기 위해 시내 산에 멈추셨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생각이다.7
(150.4)
 모세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구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열정적으로 경고하였다(신 9:4, 6). 히브리서 11장은 모세 언약의 성도들이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창 15:6)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경험하였다고 증언한다. 이스라엘은 심지어 할례의 의식도 왜곡시켰다. 원래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의의 표”(롬 4:11)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 시대에 의의 배지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 아무 유익이 없”(갈 5:2)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은 변증적 목적을 위하여 그의 반대자들이 사용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생각지 아니하고 모세 언약을 율법주의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서 3:17, 21에서 했던 것처럼 율법을 약속에서 분리함으로써 그의 반대자들의 오류를 논박하고 있다. (151.1)
 칼뱅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타난 시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용례를 “협의의 개념으로 본 실질법”8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한 바 있다. 크랜 필드는 “이 ‘협의 개념’으로 이해된 이 ‘실질법’(ruda lex)은 온전하고 완전한 참 성격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는 법9이라고 설명했다.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