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9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심
 다윗은 많은 동의어를 사용하여 왜 토라가 하늘의 태양과 별보다 더 그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주는가를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토라는 자체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해준다. 다윗도 태양이 자신의 육체에 가져다 주는 혜택을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요점은 토라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보다 심오하게 인간을 축복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이다(7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성”이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고상한 도덕적 표준보다는 오히려 역동적이며 생생한 감화를 준다. 그것은 생동하는 완전인 것이다. 영혼을 “소성”케 해주는 것이다. 히브리 어에서는 문자 그대로 영혼을 돌이키게 또는 되돌아오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지적 회심 그 이상의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 회복을 말한다. 본래 이 사상은 영혼이—생명력의 중심체로서 그리고 “joi de vivre” 로서—슬픔과 공포 또는 죄의식 때문에 낙담 중에 쓰러졌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토라가 이같이 고뇌 중에 있는 영혼을 구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할지라! 그분의 약속의 말씀은 생명을 되찾아 주며 영혼을 지옥의 심저로 부터 이끌어 올려 준다. 마치 삼손이 목마름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삿 15:19) 되었듯이 토라는 하나님을 목마르게 찾는 자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186.2)
 “우둔한 자들”—지혜가 없고 어리석게 행동하던 자들(잠 1:22)—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타인을 축복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토라의 동의어로서 십계명(출 16:34, 25:16)에도 사용되었던 단어 “율법” 또는 “증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생동하는 은혜로 소성케 된 구원받은 영혼이 십계명의 “확실한” 증거를 자신의 새로운 도덕 기준으로, 도덕적 절대 표준으로 받아들인 만큼 지혜롭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리라(시 119:98~102 참조). 간단히 말해서 시편 기자는 시편 19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구원하시며 또한 성화케 하시는 능력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187.1)
 토라의 교훈은 소성케 된 영혼의 마음을 “기쁨”으로 인도한다. 삶의 기쁨이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주된 특성을 말한다(9절). 이런 정신이 시편 전편에 흐르고 있다(시 1: 2). 모세는 일찌기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구원한 다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신 28: 47)으로 경배해야만 할 것임을 가르쳤다. 시편 119편의 기자도 토라에 대한 이런 기쁨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오직 소성케 된 영혼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187.2)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 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시 119:14~16, 111)
(188.1)
 다윗은 율법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 즉 언약의 법으로 생각했다. 그는 토라 안에서 거룩하신 존재를 만났고 그분과 교제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188.2)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188.3)
 여호와의 계명의 순결성은 눈을 “순결 하게”, “밝게”(시 13:3), “밝히게”(스 9:8), 그리고 “밝아”지게 해준다(삼상 14:27, 29). 영혼의 생명력은 눈의 생기에서 반사된다. 여호와의 율법과 여호와에 대한 우리의 “여호와를 경외” 하는 마음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대구법으로 표현되었다. (188.4)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 19:9)
(189.1)
 선지자 예레미야에 의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새 언약의 선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의로 순종하는 것에 관하여 하나의 동의어로 기술하고 있다. (189.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3)
(189.3)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렘 32:40)
(189.4)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필수 요건이다. (189.5)
 하나님의 율법은 신성과 인간 전통의 혼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선한 목자의 청아한 목소리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시 19:9). 하나님을 경외했던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89.6)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
(190.1)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토라에 기초하지 않은 랍비의 전통을 거절했을 뿐이었다(마 15:1~20).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경외심은 순결했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율법은 억누르는 멍에가 아니요, 오히려 무한한 가치와 기쁨의 보화였다. (190.2)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10)
(190.3)
 언약의 율법을 그토록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부하고 복된 사람이다. 그는 여호와를 알며 “율법의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는 율법주의자, 즉 자기 의나 공로를 내세워 율법 순종의 기초로 삼으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와 보상의 깊이를 생각하며 “즐거워” 한다. 그의 기쁨에는 아무런 가식이 없다. (190.4)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 19:11)
(190.5)
 율법을 깨닫는 능력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율법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그것이 갖는 또 하나의 기능을 알았다. 그는 거룩해지기 위한 절대 조건인 완전함에 대한 요구를 깨닫기 시작했다.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