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9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심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79.1)
 시편 19편 (179.2)
 이 아름다운 시는 한편의 찬양의 노래인데 요동치는 탄원 가운데 그 절정을 이룬다. 이 노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1~6절, 그리고 7~14절). 첫부분은 천연계 가운데 있는 피조물이 빛을 발할 때 나오는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하며, 두번째 부분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볼 때 거룩한 성경의 성문화된 토라(율법)에서 빛을 발할 때 나오는 하나님(강조하면 “야훼”)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 19 편에서는 이것이 진행의 원동력을 창출한다. 여기에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드높은 영광의 의미가 있다. 후편이 더욱 웅장하며 인간에게 더 유익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인간 자신과 그의 피조성에 대해 보다 더 계시적이다. 이 시가적 노래는 가납되기 위한 겸손한 청원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181.1)
 이 두 부분은 하나님께서 곧 창조주시요. 구세주이 시기 때문에 서로 예속되어 있다. 천연계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두 개의 책이며 피차간에 서로 보충하며 설명하여 완전하게 해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천연계 자체만으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칼빈(Calvin)은 우리가 하나님의 문자화된 계시의 안경을 쓸 때에 비로소 천연의 책을 올바로 읽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천연계로부터는 하나님의 팔과 다리만을 인식하게 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181.2)
 성경과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의 상호 관계는 특별히 시편 19편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를 다루는 첫 송영은 단지 총칭적인 이름인 “하나님”(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고 그것도 단지 일 회뿐이다. 그러나 두번째 송영은 이스라엘의 토라(구약)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을 찬양하고 있는데, 주님 곧 언약의 이름 “야훼”를 일곱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182.1)
 하나님의 칭호 사용에 있어서 이같이 뚜렷한 구분은 천연계가 하나님을 아는 구원의 지식을 모두 드러내 놓고 있지 않다는 사상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죄인이 그들의 조물주와 화목 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계신다. (182.2)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 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182.3)
 자연을 숭배하는 이방 종교는 성경(토라)에 대한 지식이 결핍되면 천연계가 크게 왜곡될 수 있다는 하나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은 한결같이 일월 성신을 숭배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신화에서 자연의 능력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방 종교를 우상 숭배주의로 언급했다. (182.4)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신 4: 19). (183.1)
 우주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 계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별빛 흐르는 밤하늘의 화려함과 해와 달의 찬란함을 쳐다보았을 때, 그들은 “우리를 만드신 손이 거룩하도다!” 라고 하는 성운(星雲)들의 찬미를 들었다. 그들은 은하계 저 너머로 그들이 추구하는 불가시적인 존재를 바라보았다. 시편 19편은 자연의 능력을 신격화하는 당시의 철학을 논박하는 단호한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 시편은 피조물과 창조주를 구분하는 선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첫부분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183.2)
 다윗이 비록 시적으로 밤과 낮의 빛을 하나님의 영광의 전령으로 의인화했다 해도 그들을 신격화하지는 않는다. 일월 성신은 묵묵히 그들의 기별, 조물주의 무한하신 권능과 뜻에 관한 기별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있다. 실제적인 웅변 한 마디 없이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지혜,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탁월한 규제와 질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4절). 히브리 원어에는 문자 그대로 “그들의 선(線:또는 규율)이 온 땅에 뻗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창세기에 언급한 대로 천체의 조화된 배치와 안정된 궤도를 말해 주는 것이리라. (183.3)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창 1:14, 15).
(184.1)
 해와 달의 존재 목적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범위를 구분하고 측정하며 한정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간단없고 충직한 임무 수행을 통하여 하늘은 온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5절에 해를 “신랑” 또는 “장사”로 표현한 은유법은 의미가 있다. 이 용어는 이방 신화에서 태양신을 표현하는 데서 유행해 온 듯하다. 다윗은 이 같은 신화적 용어 도입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는 태양이 마치 신랑 “같다” 또는 장사 “같다”고 표현함으로써 그 단어들을 비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천연 궤도 상에 그저 놓아 두셨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4절). 그런데도 태양은 창조주의 법 도를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 이상으로 그 정해진 행로를 따라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같이”(5절). (184.2)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앎
 시편 기자는 주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토라(율법)의 구원적 성격을 계속 찬양하고 있다. 이제 다윗의 마음과 영혼이 도입된다. 그는 토라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간증하고 있다. 토라의 영광은 그에게 천체의 그것보다 더 깊은 감명을 주었다. (184.3)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 19:7, 8)
(185.1)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우선 토라—번역하면 “율법”가 단순히 십계명의 도덕적 명령 뿐만 아니라 은혜의 언약과 이스라엘의 성전에서의 중보의 봉사에 관한 모든 하나님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토라는 좁은 의미로 히브리 성경의 첫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성경 전부를 통틀어 이를 수도 있다(예—고전 14:21, 34). 예수께서는 시편을 토라로 인용하셨다(요 10:34). (185.2)
 토라는 어떻게 구원과 해방을 얻는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리라! 토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거룩한 뜻을 펼치시는 거룩한 마당이다. 이 계시는 허황된 개념이 아니라 성령의 간섭을 통한 실제적 도움이다. (185.3)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 55:11)
(1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