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7. 왕이 물러남 (14:1-16:20)
 ■ 말씀을 탐구함
 이방인의 지경으로 물러나심
 14장에서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빈들”로 물러나신 반면에, 15장의 후반부와 16장의 대부분에서 그는 두로, 시돈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 장소들이 있는 갈리리 북쪽에 머무신다(15:21; 16:13). 헤롯 안티파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 갈릴리에서는 안전을 느낄 수 없다. 그는 또한 확실히 유대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신다. 이런 사실은 예수께서 이방인의 지경으로 [짧은] 여행을 하신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는 제자들과 그가 그들의 궁극적 위기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교육시키기 위하여 시간을 벌려고 애쓰고 계신다. (191.1)
 그들이 여전히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는 가장 중대한 깨달음은 예수의 신원과 사명에 관한 확고한 개념이다. 이와 같이 더욱 더 완전한 통찰을 얻은 이후라야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남은 사명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후에라도 그들의 깨달음은 그 사건을 간신히 통과하게 해 줄 만큼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같이 그들은 여전히 메시야 직분을 고난당하는 종이라기보다는 정복하시는 왕에 의거하여 본다. (191.2)
 21-28절은 예수께서 자신이 방문하시는 지역들의 이방인들을 직접적으로 취급하고 계시는, 15장에 실린 두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를 제시한다. 이 이야기 중 첫 번째 것은 가나안 여인과의 예수 사이의 당혹감을 안겨주는 대화이다. (192.1)
 그 여인은 예수께 나아와 그녀의 고통당하는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께서는 독자들에게 혐오스럽게 보이는 모종의 일을 하신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그의 유대인 제자들이 확실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는 그 여인을 무시하신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의 태도를 감지하고는 그에게 그녀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에게로 보냄을 받았다고 그 여인에게 대답하심으로써 응수하신다. 그러나 그 여인은 단념하지 않고 도와 달라고 그에게 탄원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음식을 개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한 가닥의 희망을 본다. 그녀는 천국의 복들을 받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개가 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끈덕지게 조른다. (192.2)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풍성하게 보답하신다. 그는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실 뿐 아니라 딸도 고쳐주신다. 이 이름 모를 가나안 여인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실패해 온 것—사람이 왕국에 들어가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려고 해야 한다—을 깨달았다. (192.3)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이방인 중 어떤 특정 개인을 위해서는 단 두 가지 치료만을 행하셨다. 이 여인과 8:5-13의 백부장이 그들이다. 두 사람 모두 기꺼이 자신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둘 모두 비범한 믿음을 보였고, 둘 모두 그들이 요구한 치료의 대상자들이 먼 거리에서 치료받도록 만들었다. 틀림없이, 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비유대인들에게로 확장시켜 나갈 때, 후일 그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설 교훈을 배우고 있었다. (192.4)
 그러나 실상이 이러할지 모르지만, 현대 독자들은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보이신 외견상의 가혹함을 보고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느낀다(거의 감정이 상할 지경이다). 어찌하여 그가 그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시고 심지어 그녀와 그녀의 백성을 “개”라고까지 칭하시는가? 우리는 예수의 말씀에는 얼굴 표정들과 신체 언어가 동반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여인에 끼친 예수의 말씀의 영향은 “말하는 사람의 어조와 얼굴 표정에 많이 좌우될 것이다. 그 여인은 그의 말씀이 결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사명을 포기하시지 않고도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드리는 데 빠르다”(Filson, 180)고 진술하고 있는 플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제자들은 그 여인에 대한 예수의 취급에서 가혹함만을 보았지만, 그 여인은 희망만을 보았다. 엘렌 화잇이 표현하듯이 “예수의 표면상의 거절 그 이면에 숨길 수 없는 긍휼하심이 있음을 그 여인은 보았던 것이다”(화잇, 시대의 소망, 401). 그가 그런 믿음을 가진 그 여인을 칭찬하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2.5)
 이 여인을 취급하시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하늘이 정한 순서에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다시 역설하신다(15:24; 10:6; 롬 1:16; 행 1:8). 이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하늘이 파송한 메시야를 거절하는 중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변치 않으셨다. 기독교 신앙의 보증은 자신의 언약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굳건히 세워져 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제1세기에서나 20세기에서도—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193.1)
 15:29-39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의 두 번째 경험이 발견된다. 마태는 단순히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이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발생했다고만 말해주지만, 마가는 그 기적을 둘러싼 사건들이 데가볼리 지경에 있는 그 바다의 이방인 지경에서 발생했다고 덧붙인다(막 7:31). (193.2)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은 결론을 제외하고는 5,000명을 먹이신 것(14:13-21)과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신 후에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떠나셨다(15:39). 대개가 이방인 청중들이었던 사천 명은 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적을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메시야적 사건으로 변모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14:22; 요 6:14, 15). (194.1)
 16장 서두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잠시 돌아오셨음을 알려주는, 유대인들과의 갈등 이야기를 삽입한다(1-4). 그 갈등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다시 건너시고(5절) 다시 이방인 지경으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이어진다(5절). 이 여행 기간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재차 경고하신다(16:6-12). (194.2)
 아마도 이 구절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를 시험하는 데 있어서 그 두 당파를 연계시키신 것이다. 이런 결탁의 중요성은 이 두 당파들이 유대인의 종교적 그리고 정치 생활에서 서로 적대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부유한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계층으로서, 헬라-로마 문화에 대체로 동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또한 자유주의적이었고, 부활(22:23), 천사들의 봉사(행 23:8), 그리고 오경을 제외하고는, 유대인의 성경의 유효성을 부인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바리새인들(“분리된 자들”)은 이 모든 신조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정치학과 문화에 있어서 반(反)로마적이었다. (194.3)
 그럼에도 16:1-12에서 우리는 이 두 적대적인 파당이 함께 결탁한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기성 질서에 위협임을 입증되고 있다. 오로지 이것만이 이 두 그룹을 연합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 저 미약(微弱)한 연합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까지 내내 지속될 것이다. (194.4)
 베드로에 의해 인정을 받은 왕
 마태복음 16:13은 갈릴리 동편에 도착하신 후에 예수께서 북쪽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으로 가셨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중대한 질문을 하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그는 물으신다. 그들은 유대인의 여러 영웅들을 거명함으로써 대답한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숙고하는 일을 대체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대인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 시간 동안에 예수께서는 그가 참으로 질문할 필요가 있는 그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자들에게 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3-15절). 예수께서는 일반 백성들이 그를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으시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자 곧 사명을 이어받게 될 그의 후계자들이 그를 누구로 생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들이 그의 참된 신원과 그 신원에 함축된 의미, 이 두 가지 모두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195.1)
 “주는 그리스도[메시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는 베드로의 답변은 극히 중요한 두 부분의 교훈을 제자들에게 제시할 기회를 예수께 드린다. 첫 부분은 그의 사업을 계속할 교회의 창설과 그 교회의 고유 권한(대권) 둘 모두를 다룬다(17-20절). 두 번째 부분은 정복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명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또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고난당하는 종의 역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한다(21-27절). 틀림없이 제자들은 그 교훈의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마음에 들었겠지만(17-20절) 그들은 그 교훈의 두 번째 부분은 싫어했고 적어도 초기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21-23절). (195.2)
 17절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답변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복을 선언하시고, 그 답변은 아버지로부터의 신적인 계시로 그에게 이르러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의 다음 진술은 교회 역사가 흘러 내려오는 동안 맹렬하게 벌어졌던 토론의 토대를 제공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절). (195.3)
 논쟁의 핵심은 교회가 세움을 입은 “이 반석”의 의미이다. 그것은 베드로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말하는가?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페트로스)을 뜻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페트로스)를, 그리스도께서 그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신 반석(페트라)으로 해석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견해를 받아들여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이었다고 보아 왔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