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7. 왕이 물러남 (14:1-16:20)
 예수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대결들에서 그러했듯이 그들은 고의로 논쟁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였다. 마태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그대의 성경 뒤편에 있는 지도를 한편 훑어보면, 유대의 본토의 크기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을 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전원 지대의 멸시받는 갈릴리로 왔을 뿐 아니라 특별히 “예수께”로(15:1) 나왔다. 그들의 여행은 그저 목양(牧養)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확한 목적, 즉 왜 그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고 있는지에 관해 예수께 질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85.5)
 이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그 유전을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하라.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예수께서 승인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그 유전을 경시하도록 가르쳐왔다고 암시하고 있다. 리언 모리스(Leon Morris)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유전을 무시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때때로 그것을 친히 범하는 것보다 아마도 더 나빴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연약함의 순간에 생각 없이 저지른 탈선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데 반해서, “유전에 배치되게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체계적인 그리고 용의주도한 행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Morris, Matthew, 389). (186.1)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사안(事案)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그를 고소하는 자들의 의심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는 명확하게 그들과는 다른 입장을 가르치셨고 그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신다. (186.2)
 마태에 따르면(마가는 논쟁 항목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문제는 손 씻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 쟁점이 위생적 목적을 위한 씻음이 아니라 의식상의 부정을 피하기 위한 씻음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존귀케 하려는 그들의 진정한, 그리고 진심어린 갈망에서 바리새인들은 성소에서 제사장들의 씻음에 관해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지시를 찾아낸 다음(출 30:17-21), 그 사상을 일상 생활에까지 확장시켰다. 그 외에도, 그들은 의식적인 부정을 유발하는 일들의 숫자를 늘렸고, 정결케 하는 과정을 제식화(祭式化)시켰다. 이 의식적 씻음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하게 되어 마침내 그들은 미슈나(구전[口傳]의 기록된 형태) 중 한 책 전체를 그것(야다임 혹은 “손들”로 불리움)에 할애하였다. 신실한 자들은 규정된 방식으로 그들의 손을 씻도록 요구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음식,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몸 전체가 부정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에는 부적합하게 된다. (186.3)
 앞에서 안식일을 둘러싼 구전을 논의하면서 지적했듯이(12:1-4),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범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천 개의 규칙들을 개발해 내었다. 예수 당시에 이르러서는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그 모든 규칙들을 아는 것조차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짐이 되었다(11:28 참고). (187.1)
 고대 유대인들에 대해서 너무 가혹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종교적인 성실성에서 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죄는 고집스런 반역이나 심지어는 부주의함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경건[헌신]의 죄”이다(Bruner, 2:543). 그것은 종교적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백성의 죄이다. (187.2)
 경건의 죄는 바리새 당파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중세 천주교인 그리고 심지어는 침례교인, 재림교인, 감리교인, 그리고 우리 시대의 다른 교단들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경건의 죄는 매우 교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건의 죄는 참된 종교를 파괴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 자주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도록 고무시키기 때문이다. 그처럼 교회는 성난 집사들, 종교 재판소, 그리고 다른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인성, 완전 혹은 기타 다른 교리적 요점들에 대한 그들의 정의와 다를 때 “폭력적”이 되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있다. 교회는 여전히 경건의 죄에 관해서 예수께서 주신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다. (187.3)
 올바른 안식일 준수를 놓고 유대인과 대결할 때에 그러하셨듯이, 예수께서는 그들의 유전들이 그들이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율법을 실제로 어떻게 저해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 주신다. 12장에서, 마태는 그들의 유전에 대한 예수의 도전은 그들로 하여금 살인할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인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의 물질적 소유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그들의 노령의 부모들의 신체적 필요를 소홀히 하도록 허락하는 규칙들은 다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십계명보다는 그들의 인간적 규칙들에 더욱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그처럼 그들은 그들의 유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예수께서 그들을 종교적 위선자들(연극 배우)이라고 칭하시고 그들의 종교를 허사라고 선포하신다(15:3-9). (187.4)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그들의 규칙들은 실제적으로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너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만들어 버려 그들의 종교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이 경우에는 그들의 부모를) 해치도록 만든다. 이것이 경건의 죄의 일관된 열매—심지어 오늘날에서도—이다. (188.1)
 이 구절의 후반부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등을 돌리시고, 사정권(射程圈) 밖에서 지켜보며 서 있었던 군중들에게 먼저 말씀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참된 종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군중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죄를 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외적인 부정(不淨)으로 본다(10, 11절). 후일 예수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시고 이 이야기의 세 부분을 함께 묶으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그의 논평들에서 이 사상을 확대시키실 것이다. (188.2)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에 오간 대화와 그와 군중들과 제자들 사이에 오간 대화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이 경과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불평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 불평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대답은 짧으면서도 정곡을 찔렀다. 즉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로 부적합하다. 그들을 따르면 재난에 빠질 뿐이다(12-14절). (188.3)
 그러나 베드로 그리고 아마도 다른 제자들 또한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예수께 더 설명을 해 달라고 조른다. 명백히 예식상의 부정에 관한 가르침은 유대교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어서 제자들조차도 예수의 시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은 16절17절에서 왜 그가 그들에게 성나신 말씀을 하셨는지 설명해 준다. 본질적으로 그는 “어떻게 너희들은 그처럼 아둔할 수 있는가? 지금껏 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진정한 부정은 외적인 것들—즉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신다. 정확히 말해서, 죄는 마음(사람의 내적 존재)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죄 된 행동은 바로 이런 죄악적인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17-20절; 12:34, 35 참고). (188.4)
 간단히 말해서, 참된 종교는 외형(外形)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이웃, 이 둘 모두에 대한 사랑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태도가 사람의 모든 행동의 원천이 될 것이다. 나중에 예수께서는 이 점을 더욱더 명확하게 피력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아가페(사랑)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씀하셨다(22:36-40). 그 주제는 마태복음에 있는 그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으며, 25:31-46의 큰 심판의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189.1)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5:1-20에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첫째, 종교적 유전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그 결과, 모든 종교적 단체들의 유전들은 성경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정죄되어야 한다. 둘째, 바리새인들과 다른 율법주의자들을 따라서는 안 된다. 셋째, 참된 종교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다. 넷째, 인간의 죄악성은 죄 된 본성에 그 뿌리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 행하거나 먹고 만지는 것을 취급하는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행동들이 죄악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이 문제의 뿌리는 아니다. 죄악성은 육에 속한 사람의 내적 존재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죄를 정복하는 것은 단순히 이 행동 혹은 저 행동을 행하기를 그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마음의 변화(회심)를 암시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며, 그들이 이런 저런 행위를 피하거나 정복하기 위하여 좀 더 열심히 노력하면 더 좋아질(심지어는 완전하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단(異端)이다. 이 모두는 예수의 사고와 신약의 사고에 전혀 이질적(異質的)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죄는 마음의 문제이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방향이 변화되도록 하려면 성령을 통하여 위로부터 나야 한다(요 3:3, 5; 롬 12:2 참고). (189.2)
 ■ 말씀에 들어감
 다음의 질문들을 살펴보기 전에 15:21-16:20까지 두 번을 읽으라. (190.1)
 1. 그대의 성경 뒷장에 있는 지도에서 두로와 시돈(15:21)을 찾아보라. 그대는 15:22-28에서 가나안 여인에 대한 예수의 취급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의 말씀에 관하여 가장 악의적인 해석을 한 단락을 써 보라. 가장 선의의 해석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보라. 그대는 이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190.2)
 2. 마태복음 16:1, 6, 11, 12은 각기 유대 당파들의 이상한 결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대는 이미 바리새인들과 그들이 무엇을 대표하는지에 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혹 그대가 그렇지 못하다면 성경사전을 참조하여 그 주제에 관한 그대의 기억을 새롭게 하라. 또한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신약에서 사두개인들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 그런 후에 성경사전을 사용하여 그대의 이해를 보충하라. 마태가 이 두 유대인 당파를 결합시킨 데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설명하라. (190.3)
 3. 성경 지도에서 가이사랴 빌립보의 위치를 찾아보라. 이 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다소간의 배경적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사전에서 인자(16:13)라는 문구를 조사하라. 그대는 16:16의 베드로의 선언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16:16-18에 따르면 교회가 무엇 위에 세워져 있는지 한두 문장으로 기술하라. 어떻게 마태복음의 이런 이해가 고린도전서 10:11, 에베소서 2:20, 사도행전 4:11, 그리고 베드로전서 2:4-8 등과 같은 구절들과 조화되는가? 16:19, 20을 연구하면서 그 선물에 함축된 의미에 대한 그대의 인상을 글로 써 보라. 누가복음 11:52마태복음 16:19, 20과 관계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관계인가? (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