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7. 왕이 물러남 (14:1-16:20)
 데이비스와 앨리슨의 논증의 타당성이 입증될 수는 없긴 하지만, 예수 자신이 헤롯으로부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셨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14:1-16:20에 기록된 것처럼 처음으로 물러나도록 이끌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의 생애에서 결국에는 당국자들과 대결할 때와 장소가 있겠지만, 갈릴리는 그럴 장소가 아닐 것이었고, 예수께서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다(요 7:30; 17:1 참고). 현재로서는 문제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181.2)
 5,000명을 먹이심과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시도
 예수의 첫 번째 물러나심은 헤롯의 길에서 벗어나시려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 물러나신 “빈 들”은 여전히 갈릴리의 변경 내에 위치해 있는 듯이 보인다. 누가복음 9:10은 그가 벳새다 근처에서 5,000을 먹이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반응을 보인 방법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떡을 먹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대인인 것처럼 보인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181.3)
 5,000명을 먹이신 것은 많은 사람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었지만 무리들은 여전히 그의 말씀을 즐거이 들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 장면은 그들이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면서 그를 따르고 있는 수천 명의 장면이다. 심지어 백성들은 그가 도착할 때 그곳에 따라갈 수 있도록 그의 배가 갈릴리 바다의 어느 해변에 도착할지에 대해서 추측을 하기까지 한다(14:13, 14). (181.4)
 군중들은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할 뿐 아니라 그도 그와 같이 반응하신다. 그는 그들의 병들을 고치실 뿐 아니라 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심으로써 그의 위대한 기적들 중 하나를 행하신다(14-21절). 실제적으로, 그 기적은 5,000명이라기보다는 20,000명을 먹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오직 성인 남자들만 수(數)에 들기 때문이다. 5,000명에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182.1)
 이런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마태가 우리를 위하여 묘사한 장면들에 대한 더 좋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의 기적적인 봉사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열망하는,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물줄기로 뒤덮인 갈릴리의 메마른 구릉들 중의 하나이다. 헤롯 안티파스가 우려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실로 잠재적인 정치적 위협 인물이다. (182.2)
 그리고 저 위협의 현실성은 5,000명을 먹이신 일로 거보(巨步)를 내딛는다.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직후에 마태는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22절)고 기록한다. (182.3)
 예수께서 제자들이 배를 타고 그들만 따로 항해하도록 만드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는, 마태복음에는 명확하진 않지만, 우리가 요한의 설명을 고찰할 때 매우 분명해진다. 요한은 백성들이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볼 때 그들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하기 시작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고 나서 유대인들 편에서 그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요 6:14, 15) 움직임이 뒤따른다. (182.4)
 백성들은 그의 강력한 표적 혹은 기적의 연고로 예수를 “오실 선지자”로 확인한다. 요세푸스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신이 오실 해방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유대인의 제1세기 정치적 봉기들은 선지자와 표적의 행함이란 주제가 동반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Brown, 1:249).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메시야적 약속에 의지하여 유대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 그들이 예언의 성취를 경험하고 있다고 믿었다. (182.5)
 위대한 구출자 모세가 그들의 “선조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요 6:31)를 주었다는 것과의 연결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두 번째 모세, 두 번째 구출자-모세와 같이 하늘로부터 떡을 공급하실 수 있는 또 다른 선지자-처럼 보이는 어떤 분을 발견한다. 예수를 왕으로 만들려는 운동의 배후에 강력한 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83.1)
 제자들조차도 그 가능성에 휩쓸려 버린다. 마태는 예수께서 그들을 배에 강제로 태워 그를 떠나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으며, 그 동안에 그는 홀로 무리들을 해산시키셨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14:22). 제자들은 메시야적 잠재력을 명확하게 감지했었음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그의 훌륭한 솜씨를 보이실 때는 지금이다. 지금이 메시야적 순간이다”라고 그들은 생각했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사상을 고려해 볼 때, 왜 예수께서 그가 무리들을 다루실 수 있기 전에 먼저 제자들을 떠나 보내셔야만 했는지를 훨씬 더 깨닫기 쉽다. (183.2)
 제자들의 흥분과, 아마도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내세우는 데 있어서 “꽁무니를 빼고 계신다”는 생각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 중 몇 명은, 메시야적 영광의 왕국의 시작이라고 그들이 희망했던 것의 전면(前面)으로 예수를 억지로 떠밀어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라고 간주했다. 결국, 예수의 부활의 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그의 왕국이 로마의 압제자들을 타도할 정치적 왕국일 것으로 인식했다. (183.3)
 우리가 여기서 예수께서 십자가 없이 왕국을 얻으라는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면 이 이야기의 주요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궁극적인 시험에 직면해 계신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광야 시험의 반복이긴 하지만(4:3, 4), 더욱 큰 세력으로 닥쳐온 시험이다. 그는 자신이 실로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음을 입증하셨고, 백성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백성들은 너무도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그의 왕국을 세울 태세다. 예수의 “지원 그룹들”(열두 제자들)도 그 운동의 배후에 있다. 여기 첫 번째 순서의 시험이 있다. “빵으로 왕국을 건설하라. 기아를 폐지하는 것을 그대의 정강(政綱)의 첫 번째 사항으로 만들라. 항상 빵과 고기들을 증가시키라. 그러면 백성들이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Denney, 210). (183.4)
 여기 십자가 없이, 배척받는 종의 길을 따름 없이 그의 왕국을 설립하라는 옛 시험이 있다. 이 이야기의 심각성은 무리들을 해산시키신 후 즉시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14:23; 요 6:15 참고)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헌신을 재 다짐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메시야를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필요가 있다. 그의 사명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예수의 생애에 항상 중심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항상 기도의 문제이다. (184.1)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해산시키시고 십자가 없이 그 왕국을 성취하려는 그의 정상적인 인간적 경향을 극복하시는 일, 이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성공을 거두셨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그의 봉사에 항구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태복음 15장16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방인의 국경 내에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한다. 군중들의 메시야적 흥분을 감안해 볼 때, 그께서 유대인의 지경을 떠나 “빈들”로 물러나신 것도 충분치 못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다음 단계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당국자들과 로마 당국들과의 그의 마지막 대결을 향하여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으시기 전에, 유대인의 정치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시는 것일 것이다. (184.2)
 그러는 동안,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그 운동의 현장에서 강제로 퇴거된 후에, 당혹감에 빠진 제자들은 영적 좌절과 실망 그 이상의 것과 고투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물리적 풍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 그들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계신 것을 발견한다(14:24-27). 그러고 나서 이 이야기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으려다 실패한 것에 대해서(28-31절) 그리고 베드로와 예수가 모두 배 안으로 들어온 후에 폭풍이 잠잠해진 것에 대하여 말한다(32절). (184.3)
 그 이야기의 절정은 베드로의 경험이나 예수께서 그 폭풍을 잠잠케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경배와 고백이다. 그들은 예수께 부르짖는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 그들이 이 구절로 무엇을 뜻했는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구약을 연구한 유대인 학도들로서 그들은 파도 위를 걷고 폭풍을 잠잠케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여호와 자신에게만 할당된 신적인 대권을 행사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데 거의 실패할 수 없다(예컨대, 욥 9:8; 시 77:19; 사 43:16; 51:9, 10; 합 3:15). (185.1)
 제자들이 한 말의 정확한 의미에 관한 우리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으로써 그들은 그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있어서 거보를 내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태복음 14:33은 제자들이 그 직함을 예수께 부여한 첫 번째 구절이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되풀이해서 사용될 때마다 그 직함은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4장에서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그의 인격과 사명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능하신 행위들에 기초되어 있다. 그들의 이해는 16:16에서 더욱 완전해 질 것이다. 부활 이후까지는 어느 다른 곳에서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우리는 공관복음이 제자들의 믿음이 조금씩조금씩 계발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85.2)
 마태복음 14장은 예수께서 신원 미상의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복음서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구절들 중 하나로 끝을 맺고 있다(34-36절). 15장의 첫 번째 부분은 그 이야기를 점점 증폭되어 가는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갈등으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185.3)
 15장에서 예수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갈등은 외적으로는 의식상의 부정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지만, 더욱 더 깊은 차원에서, 그것은 종교의 바로 그 본질과 인간의 죄악성의 깊이에 기초되어 있다.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