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I부 참 지혜 (3:1-18) 6. 혀에 관한 잠언들 (3:1-12)
 우리가 1:4의 논의에서 이미 주목한 바와 같이 온전한 사람의 정의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죄 없는 사람도 아니다. 중요점은 성숙함과 온전함에 있다. James Adamson은 이 절에 대한 언급에서 기록하기를: “헬라어 teleios[온전]는 그것의 본래의 의미상 모자라고 미숙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온전한 성숙, 원숙함, 완전함, 그리고 ‘끝’ 혹은 telos를 완성하는 것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telos가 의미하는 그곳은 단순히 정지하는 어떤 곳이 아니라 그 종류의 본성 속에 놓여있는 속성과 특징 속에서 성장 혹은 진보하는 완성된 채움을 획득하는 곳이다”(James: The Man, 369, 370). 비록 이것이 온전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일지라도 야고보는 더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만일 그 혹은 그녀의 말하는 것에 있어서 결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생활에서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 혹은 그렇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허용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실수한다는 것과 혀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많은 것들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몸의 일부인 그것을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온 몸에 굴레를 씌울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이다. (147.2)
 여기에서 야고보가 단순히 그의 감정으로 혀의 힘에 대해 흥미를 가진 것이 아님을 주목하기로 하자. 초기 지혜 문학서 많은 기록도 이 점에 관해서는 동일하다. 특별히 잠언에서는 제멋대로인 황급한 혀와 비교하여 잘 통제된 혀에 관련된 말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잠언 10:19에서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언급하였다(10:8, 11; 16:27, 28; 18:7, 8와 비교하라). 그러나 야고보가 겉으로 가장 좋아하는 듯이 보이는 묵시적 지혜 문학서에서 우리는 그것과 병행을 이루는 본문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본문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혀로 실수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강조한다. (148.1)
 이 본문에서 Jesus ben Sirach는 기록하기를, “사람은 그렇게 하려는 의사 없이 실수할 수 있다. 그의 혀로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Sir. 19:16). William Barclay는 모든 유대 저술가들에 대해 기록했는데, Sirach은 “주로 혀의 무서운 잠재성을 강조하였다”(82)고 하였다. (예를 들어, 5:13-6:1; 14:1; 19:15; 22:27을 보라; 특별히 28:13-26을 보라.) (148.2)
 말의 재갈
 야고보는 그의 청중들이 혀가 힘있고 위험하다는 그의 논쟁의 중요성을 붙잡기를 원하였다. 그의 논쟁은 비록 그 크기가 작아도 그것은 그것의 성취도에 있어서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일련의 예증을 보여준다: 큰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작은 재갈, 폭풍 속에서도 큰 배를 조종하는 작은 키; 큰 숲에 불을 붙이는 작은 불꽃; 그리고 모든 짐승과 피조물들을 길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3:3-8). 이러한 예증들 중의 어느 것도 야고보가 처음 고안한 것은 없다. 그는 그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의 청중들의 세계 속에서 그 이미지를 그렸다. (148.3)
 이 일련의 은유 중에서 첫째는 말의 입에 있는 작은 재갈에 초점을 둔다(5절). 비록 재갈의 크기가 명확하게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이 절의 끝에 있는 “모든 종류의 짐승”에 대한 언급은 인도하는 도구들의 작음과 그 효과의 극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말과 가까운 어떤 사람이라도 만일 어떤 말이 어릴 적에 굴레와 재갈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그 짐승은 통제될 수 없는 힘으로 달리며 질주할 것임을 확신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짐승이 길들여져 재갈을 받아들이면 가장 큰 말도 기수 마음대로 될 것이다. (149.1)
 그 직유와 비유는 인상적이지만 정확히 평행을 이루지는 않는다. Duane Watson에 따르면 굴레는 말을 제어하지만 “혀는 아주 똑 같은 물리적 방법으로 사람을 제어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더 넓은 차원에서, 이 비유의 초점은 큰 통일체의 작은 요소가 큰 통일체의 방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기록했다(58). 비록 재갈보다 더 작은 혀이지만 위대한 것들을 성취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부정적인 것뿐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매우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149.2)
 배의 키
 더 큰 물건에 영향을 끼치며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작은 물건에 대한 사상은 두 번째 예증에서 더 강화되었다(4절). 재갈과 말의 경우처럼, 야고보는 그의 청중들과 상당히 친근감이 있는 또 다른 예증을 선택했다. 땅 위에 있는 말과 바다의 배는 수송을 위한 두 가지 대중적 형태이다. 물론, 그때의 배는 오늘날 우리의 대양 쾌속선이나 대형 운송선보다 크지 않지만, 그것들은 1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큰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배의 곡물 운송과 바울을 포함한 276명의 사람을 싣고 로마로 가던 알렉산드리안 배에 대한 누가의 언급을 상기할 수 있다(행 27:37, 38). 비록 배이지만 그 크기는 그것을 조종하는 키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 것이다. 그 배와 승선자와 화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 배의 매우 중요한(만일 중요하지 않다면) 물건이 바로 이 작은 도구인 것이다. (149.3)
 같은 방법으로 비록 신체의 작은 부분이지만 혀는 그 크기와 비교할 때 매우 강력하다. 야고보는 그것이 “큰 것을 자랑하도다”고 말한다(3:5). 그의 말들은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9)고 말한 시인의 생각에서 가져온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야고보서 3:5이 특별히 혀에 대한 자랑으로 오만해진 것에 대한 생각을 자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혀는 합법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것들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개념이 있다. 역사는 저하된 것에 용기를 주고, 부주의함을 각성시키고, 고귀한 행동으로 남자와 여자를 분발시키고, 더 깊은 인간적 감정들을 표현하게 하는 위대한 웅변술의 힘에 대한 수많은 예증들을 제공하였다. 언어의 마술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고통의 오랜 이야기 속에서 셀 수 없는 부분에서 역할을 맡았다. 그러므로 이점에 있어서 아마도 야고보는 혀를 경멸하기 위한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성취한 것에 대한 중요성에 주의를 끌려고 했을 것이다”(74, 75)라고 기록하도록 R. V. G. Tasker를 이끌었다. 아직도 뒤따라오는 두 비유의 빛 속에서 야고보가 혀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고작해야, 그의 생각은 중도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빠도(최소한) 부정적이다. 이 문단에서 그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혀의 강력하고 죄악된 효과이다. (150.1)
 불의 불꽃
 야고보의 비유 중 세 번째는 불과 같은 혀를 제시한다(5, 6절). 유대 지혜 문학서는 혀를 불꽃이나 불에 비유하는 말들이 많다. 예를 들어, 솔로몬은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잠 16:27; 비교 26:21; 시 39:1-3; 120:2-4; 사 30:27; Sir. 28:22)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아마도 고대의 현자들이나 심지어 더 동시대의 그레코로망 저자들과 대중적인 말들로부터 이 사상을 차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예증은 팔레스타인의 일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Ralph Martin은 야고보서의 배경이 메마른 가시떨기와 나무로 덮여있는 언덕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그런 환경은 문자적으로 마치 아주 작은 불꽃에 폭발하기를 기다리는 화재 위험이 많은 상태이다. 그 편지의 독자들은 작은 불꽃이 그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만큼 신속하게 펴져 가는 불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위험성을 식별하고, 그 심상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113). 이것이 혀의 본성이다. (151.1)
 3:6에서 야고보는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혀의 잠재성을 명백히 주장한다. 비록 이 절의 일반적인 의미는 분명하지만, 그것의 섬세한 부분들을 검토하여 볼 때 어렵고 복잡하다. 어떤 사람은 이 서신에서 가장 어려운 절을 6절로 본다. 다른 사람들은 헬라어 본문이 오류(그것의 전달에 영향을 준 개념에서)가 있다고 제안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단어들이 기록된 지 오랜 뒤에 첨가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절의 포괄적인 지적은 잘못 이해할 수 없다. (151.2)
 야고보의 첫 번째 요지는 혀가 “우리의 지체 중에 불의의 세계라”(6절)는 것이다. 세계(world)는 난해한 단어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헬라어 단어 kosmos“치장”(adornment)으로 번역하였는데, 그 개념은 혀가 죄악을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가 서신의 다른 곳에서 그것을 사용할 때, 그는 그 용어를 그러한 의미로 쓰지 않는다. 1:27에 대한 우리의 토론에서 우리가 주목한 바와 같이, 야고보에게 있어서 “세계”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사물, 가치, 행동에 대한 전반적인 영역이다. 혀는 죄악된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영역을 나타낸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를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게’ 만든다고”(마 15:11)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면전에서 무리에게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혀의 죄악된 사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음직하다. 그리고 난 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8-19)라고 말씀하셨다. (151.3)
 혀가 불의의 세계이기 때문에, 야고보의 다음 요지는 “그것이 온 몸을 더럽힌다”(3:6)는 것이다. “더럽히는”으로 번역된 단어는 얼룩과 오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혀의 죄악된 영향력은 개인을 얼룩지게 하고 오염되게 하는 것이다. 혀는 1:27에 있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 “그 세계에 의해 오염되어 지는 것”으로부터 지켜주는 경건—에 대한 반전을 성취한다. 혀의 영향력은 전체적으로 사람을 오염시킨다. Peter Davids는 그것을 독창적으로 말하기를: “혀의 불꽃은 열정을 사로잡는다. 어떤 기질이 일어난다. 정욕이 불타오른다. 곧 그 말들은 그것이 밖에서 들을 수 없는 내적인 대화이든 행동적인 말이든, 갑자기 행동으로 나타난다. 감정, 몸 전체는 통제할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간다”(James, 83). (152.1)
 죄악된 혀에 의해 개인적인 육신도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생의 바퀴를 불사르”(3:6)게 된다. “생의 바퀴”(course of life)라는 구절 또한 난해하다. 주석서들에서 수없이 오랜 평론들이 그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쓰여져 왔다. 그것은 윤회 철학과 관련이 있는 고대 신비 종교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생애의 순환”에서 비롯된 기술적 용어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여기에서 이러한 전문적 개념 속에서 그것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혀로 인한 오염은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현상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생애와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존재의 전반적인 과정을 통해 그것의 나쁜 영향을 설명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 Lehman Strauss는 “부주의하고 현명하지 못하고, 파괴적으로 말해진 말은 우리의 존재의 전반적인 영역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고, 우리의 가족의 생애와 교회의 생애, 그리고 공동체의 생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럽고 불순하고 분노하고 분열시키고 불친절한 모든 말 뒤에는 사단 그 자신이 있다. 나는 사이가 갈라져서 그 구성원들이 거의 20년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던 한 가족을 알고 있는데, 모든 것이 약간의 불친절한 말의 결과였다”(132)고 기록하여 그 본문에 대해 교훈적으로 언급하였다. (152.2)
 이 죄악된 혀의 뒤에는 사단 자신이 있다는 Strauss의 지적은 6절에 있는 야고보의 마지막 요지와 조화를 이룬다. 거기에서 야고보는 혀 자체가 지옥의 불에 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혀는 지옥으로부터 그것의 권능을 받은 것이다. “지옥”이라고 번역된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지옥에 대하여 가장 자주 쓰인 Hades가 아니다. 야고보는, 히브리 구절 “힌놈의 골짜기”의 음역인 gehenna를 사용했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인데 그 도시를 위한 쓰레기 소각장이었다. 그것은 계속하여 타오르고 연기가 나기 때문에, 사악한 자의 마지막 처벌과 모든 행악자들과 사단의 운명의 판결의 장소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마지막 구절과 함께 야고보는 혀의 배후에 있는 권능은 사단 자신이고 그 권능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서신의 구절은 이 절을 생생하게 해석한다: “우리의 말에 의해 우리는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고, 조화에서 혼돈으로 바꿀 수 있고, 연기 속에 모든 세상을 집어넣을 수 있고, 그것과 함께 연기로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고, 지옥의 구덩이에서부터 완전히 타오를 수 있다”(6절). (153.1)
 짐승들이 길들여짐
 야고보는 그의 다음 예증으로써 말없는 짐승들의 세계와 그것들을 길들이고 다루는 인간의 능력을 사용했다. 시인은 수세기 전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6-8)라고 기록하였다. 야고보는 우리가 그 모든 종류의 짐승들을 길들일 수 있지만(심지어 벌레와 해물(海物)까지도!),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다(3:7, 8). (154.1)
 R. A. Martin은 야고보가 혀는 인간 통제의 범위를 넘었다고 진술했을 때 그가 과장법에 빠졌다고 제안한다. “모두에게 있어서 때때로 그들의 혀는 통제된다. 모든 종류의 짐승이 길들여진다고 하는 과장된 주장이 더 이상 고집되어서는 안 된다(7절). 이것은 인간의 말이 작용할 수 있는 죄에 대한 크고 두려운 잠재력을 독자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는 인상으로 남기기 위해 말하는 과장법이다”(38). Martin이 야고보의 강력한 비관주의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다. 수세기 전, 펠라기아주의자들은 야고보의 진술을 “어떤 사람이 그 혀를 길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았다. 성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아무도”(no one)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no human being)를 말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정복할 수 있을 선포한다”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Kugelman, 39에서 인용함). 그러나 야고보는 그러한 낙관적인 단어를 포함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그리고 정확히 한 사람도 그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모든 고대의 잠언 기록자들처럼, 야고보는 그의 주장을 그의 상황의 현실에 기본을 두었다.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