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I부 참 지혜 (3:1-18) 6. 혀에 관한 잠언들 (3:1-12)
막대기와 돌멩이는 나의 뼈를 부서뜨릴 수 있지만
말은 결코 나를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143.1)
 야고보는 어린 시절 인기 있던 이 조롱을 환기시키며 전환한다. 많은 경우에, 말이 원인이 된 상처는 막대기나 돌멩이에 입은 상처보다 더 심하고 오래도록 지속된다. 후자의 상처는 곧 나을 수 있지만 때로 혀의 실수가 가져다 준 고통은 결코 치료되지 않는다. (143.2)
 야고보는 그가 왜 혀에 대한 토의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명백하고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혀와 말하는 것은 각 장에서 언급되었다—1:19, 26; 2:12; 3:1-12; 4:11; 5:12.) 그러나 잘못 사용된 말이 끝없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야고보의 깊은 관심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제에 관한 야고보서의 가장 확대해석된 설명을(3:1-12), 그는 지혜에 관한 본문에서 토론한다. 히브리의 지혜 전통에 있어서, 지혜는 생애의 곤혹스러운 것들에 대하여 의미를 만들도록 요구하며, 고통과 지혜는 지속적인 상호관련이 있다. 잠언과 다른 구약성경과 유대 지혜 문학을 주의 깊이 읽어 보면, 통제되지 않은 말이 생애의 고난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야고보는 아마도 그의 전반적인 주제인 고통을 또 다른 각도에서 다루기 위해 일련의 지혜에 관한 격언들을 사용한다. (143.3)
 이 주된 토의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2:26)이라는 진술에 이어 따라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무슨 논리적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R. V. G. Tasker는 해결을 제안하기를: “자연스럽게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진술에서 행함이란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말 또한 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일들이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성취되어 지고 있다”(72). 그러나 이것이 야고보가 의도하고 있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조금 의심스럽다. (144.1)
 더욱 정확하게 하면 혀에 대한 논의는 1:26과 관련이 있다. 그 구절에서 야고보는 참된 경건과 거짓된 경건에 대한 그의 표현을 시작했다. 거기에서 그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고 진술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그는 또 다른 참되고 순수한 경건을 만드는 요소를 표현한다. 그것은 마치 26절에서와 같이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긍정적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27절에서 또 다른 참된 경건을 만드는 요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야고보가 참된 경건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국면에 대하여 그의 생각을 넓힘에 따라 그는 2장에서 후자(27절)를 발전시키다. 3장에서 그는 다시 전자(26절)로 돌아와 드디어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144.2)
 ■ 말씀에 들어감
 위의 구절을 두 번 읽고 그 후에 아래의 과제를 하라. (144.3)
 1. 당신의 관주에서 지혜서(잠언, 전도서, 시편의 한 부분)와 병행을 이루는 본문을 기록하라. 그것들을 살펴보고 당신의 노트에 뽑아 보라. 이러한 구약 성경들을 띄엄띄엄 읽고 만일 당신이 야고보가 1-12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다른 문구들을 찾아보라. 그것들을 기록하라. 당신이 야고보의 권면과 유사한 현대적인 속담을 생각할 수 있는가(예를 들어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에도 실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을 적어 보라. (144.4)
 2. 선생(혹은 지도자)이 다른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를 두세 가지 적어 보라. 각 이유를 설명하라. (145.1)
 3. 가르치는 것 외에 1절에서 야고보의 조언을 적용할 수 있는 현대의 직업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들을 적어 보라. (145.2)
 4. 이 문단에서 1절이 그 나머지의 절들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라. (145.3)
 5. 전반적인 구절에서 각각의 예증과 비유들이 얼마나 야고보의 지적을 날카롭고 강력하게 만드는지 설명하라. (145.4)
 6. 어떻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저주할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찬양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설명하라. (145.5)
 ■ 말씀을 탐구함
 선생과 그들의 말
 이 부분(3:1-12)에서의 첫 권면은 선생들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람들의 분명한 신원은 확실치 않다. 그 권면이 지혜 구절 안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 공동체와 개인적인 집회에서 지혜에 대한 현인이나 선생이었다는 것을 제안한다. 야고보 당시에 이러한 선생의 많은 수는 랍비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명예와 권력의 자리를 몹시 갈망했다. 따라서 유대인 부모의 소망은 그들의 아들들이 랍비로서 훈련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랍비적인 선생이 되는 것을 몹시 갈망했다. John A. Burn은 “랍비와 대화를 하든지, 손님으로 그들을 모시든, 그들의 딸과 결혼을 하든, 심지어는 그들의 짐을 날라주고, 물을 길어주고, 그들의 나귀에 안장을 얹어주는 것까지도, 랍비와 어떤 사회적인 접촉을 가지는 것을 사람들은 몹시 원했다”(124; 또한 유대주의 안에서 선생들에 대한 높은 존경심에 관한 많은 예증들을 위해서는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233—244에서 Jeremias의 매우 유익한 연구를 보라)라고 기록했다. 선생들은 랍비일 뿐만 아니라 회당이나 혹은 모임의 또 다른 어떤 형태의 지도자들이었다. 야고보의 경고는 아마도 상당한 사회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선생들”이나 “현자들”은 셀롯당의 정치적 조직망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며, 그는 다음 장에서 더욱 명쾌하게 다룰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야고보가 그의 생각 속에 어떤 특별한 무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그가 그의 생각 속에 어떤 무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모임, 회당, 정치적 사회적 부분뿐만 아니라 “그 신발이 맞는(그것에 해당하는)” 누구라 하더라도 지도자이고 선생인 자들을 다룰 수 있었다. 야고보가 이 시작하는 절에서 첫 사람을 복수로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포함시킨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청중들의 많은 수가 선생이 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경고했다. (145.6)
 말에 관한 그의 토론의 본문에서 이렇게 경고한 이유는 야고보가 선생은 말에 대하여 매우 우수한 사람들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의 바로 이러한 특성이 감정을 상하게 하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그들의 말의 위험성에 그들을 노출시킨다. 비판적(많은 경우에 혹독하게 비판적인)인 훈련을 받은 선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두드러진 지위가 그들로 하여금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행동으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 행위자(선생들)와 도구(말), 이 두 가지 모두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146.1)
 표면적으로, 이 시작하는 절은 그 공동체 안에서 선생이 된 사람들을 격려하려는 의미가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야고보의 초점은 그것이 아니다. 그의 강조점은 첫 절의 마지막 구절: “선생이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에서 발견된다. 야고보는 매우 큰 책임감을 가진 이런 직업에 있는 고유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책임이 클수록, 심판도 더 커진다. 직업의 도구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큰 책임감을 가져야하고, 도구의 오용은 혹독한 심판을 가져올 것이다. 야고보의 말은 마태복음 12:36, 37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만일 이것이 모든 사람에 대한 진리라면, 막대한 권력과 책임을 받아 탁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고 말에 대하여 능숙한 선생에게 얼마나 큰 진리이겠는가? (146.2)
 우리가 너무 빨리 선생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머리에 막대기를 올려놓는 것으로 이 본문을 사용하기 전에 야고보가 다음에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자. “우리는 다 실수가 많으니”(3:2); 즉, 우리는 모두 죄를 짓고 실수를 한다. 우리는 모두 약점이 있다. 아무도 그 혹은 그녀가 실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리는 최소한 공통으로 짓는 죄를 짓는 것—혀의 오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숙한 인간의 표시는 그 혹은 그녀의 혀를 조절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이 절의 후반부의 요점이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곤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