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 저자의 여론 조사자들이 다윗에게 그의 느낌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18:5의 인정하는 말에 첨가하여 이 장은 다윗의 인기에 관하여 두 번의 확인을 더하고 있다. 16절에 의하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다. 그리고 이 장은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30절)는 말로 끝을 맺는다. (165.3)
 대중적인 인기 상승의 기류 속에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 100명의 양피(陽皮)—다윗은 넉넉히 200개를 가져왔다—를 치르고 미갈과 결혼한 일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로 드러난다. 사울은 먼저 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곧 그 약속을 저버렸다(후에 다윗이 메랍의 다섯 아들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 주어, 그들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삼하 21:9] 단 것은 복수였는가?). 다윗이 미갈과 결혼한 것에도 중요한 점이 있다. 적어도 저자는 왕의 딸을 다윗의 열렬한 지지자의 무리 속에 연합시켰다. 이미 왕의 아들(1, 3, 4절)과 그의 장수들(5절), 그리고 모든 백성들(5절),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윗을 따르는 무리 속에 있었다. 제사장들만 따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곧 합류할 것이다. 다윗이 얻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는가? 그는 재능이 있었고 재주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다. (165.4)
 다윗의 생명을 노리는 사울의 계획은 19장에서 더욱 강해졌다. 그는 심지어 요나단과 모든 시종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1절). 그러나 정직하고 순진한 요나단은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다윗에게 위험을 먼저 경고하고 다윗의 운명에 관하여 왕과 담판을 짓겠다는 그의 의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말이 왕에게—일시적으로나마—먹혀들었다. 왜냐하면 사울이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6절)고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166.1)
 정직하고 순진한 요나단은 그 모든 이야기를 다윗에게 다 고했고, 왕궁으로 돌아오도록 확신시켰다. 비현실적이고 거의 무모하게 보이지만, 다윗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었다(7절)—블레셋과의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 다윗의 이름이 더욱 유명해질 때까지. 그때에 다윗이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는데,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또 다른 창 던지는 사건을 부추겼다(9, 10절). (166.2)
 다윗이 사울의 창을 피하였지만 사울의 딸 미갈, 곧 그의 아내가 이렇게 경고하였다.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11절). 사울의 부하들이 그의 집을 감시하는 동안 미갈은 다윗을 도와 창 밖으로 도망하게 함으로 아버지를 거역하였다. 라합이 여호수아의 정탐들을 도왔던 여리고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수 2:15). 만약 그 집이 성벽의 일부였다면(라합의 경우와 같이), 다윗은 성 밖으로 도망하였을 것이다. (166.3)
 눈을 속이기 위하여 미갈은 다윗의 침대에 우상(히브리어 teraphim [트라핌])을 눕혔는데, 그것을 옷으로 가리고 염소의 털을 머리 위에 두었다(13절). 이야기대로 한다면, 우상을 침대에 눕힌 계략이 다윗을 위하여 시간을 벌어 주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미갈의 거짓말, 즉 그가 병들었다고 한 것은 시간을 벌어주었다(14-17절).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대면했을 때에 또 다른 거짓말을 하였다. 다윗이 자기를 도망하도록 돕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노라며 둘러댔다(17절). 해결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시점부터 다윗의 추종자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진실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울의 정신 나간 상태를 이유로 잡아 거짓말해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이 좋은 이유로라도 일단 거짓말을 시작하면 그 사람을 참으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167.1)
 이 이야기의 윤리성을 떠나서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딸 미갈이 그들의 아버지보다도 다윗에게 더 충성했다는 점이다. 다윗이 훗날 왕좌를 차지하겠지만 이 사건은 그가 사울을 떠나는 것, 즉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167.2)
 19장은 또 다른 도피—라마에서 다윗이 사무엘과 함께 잠시 머묾—로 끝난다. 이 사건은 한 편으로 사울의 비극적인 상황을 드러내며, 다른 편으로 다윗에 대한 선지자의 지지를 나타낸다. 이 둘은 저자의 이야기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사울의 형편에 대하여 「새개정표준역」은 히브리어 본문의 생생함을 전달한다: “그도 또한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광란 가운에 누웠다. 그는 벌거벗은 채로 하루 종일, 그리고 그 밤을 누워 지냈다”(24절). 「새국제역」은 더 정중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겉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였다. 그런 모습으로 밤낮 누워 있었다.” 성경은 15:35“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라는 진술과 19:24의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있었던 일 사이의 긴장을 설명하지 않는다. 두 구절의 히브리어는 명백하다. 단지 「새국제역」은 앞 구절에 동사 하나를 첨가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가 다시는 사울을 보러 가지 않았다”(15:35). 중요한 사실은 성경의 기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연대기적 정확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위 성경의 모순점이라고 하는 비평가들의 조롱에 대하여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대신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시험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보수적인 성경의 해석자들은 성경의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20세기의 요구를 부과하는 일이 잦다. (167.3)
 이 경우에 있어서, 비록 저자가 사무엘의 말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19장에 그가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15장19장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 저자의 염려는 연대기가 아니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근심으로 그의 심령을 눌렀다. 그는 그들이 저들의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나도록 사울의 실패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고, 다윗의 파멸의 이야기의 전주로서 다윗의 부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으로부터 돌아서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설명해 준다. 성경에다 우리의 견해들을 부과함으로써, 연대기에 관한 우리의 염려가 성령이 저자를 감동하여 쓰게 한 진정한 기별을 듣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비극일까! (168.1)
 도망하는 다윗(20:1-42)
 제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난폭한 이야기와 같이 20장의 다윗과 요나단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사무엘상∙하의 전체의 구성 속에서 저자가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떠나서라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다윗과 요나단은 왕궁에서 다윗이 더 이상 안전하게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직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함없는 우정의 상징이 되었다. (168.2)
 그 이야기는 이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을 확인하는 맹세와 강한 언어들로 뒤덮여 있다. 인자(헤세드[ḥesed])라는 단어가 연결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 이채롭다. 20:8에서 다윗은 요나단에게 그들 사이의 “신성한 언약”(「새개정표준역」; 히브리어, “여호와의 언약”) 때문에 “인자”를 베풀 것을 요나단에게 호소한다. 20:14, 15에서 입장을 바꾸어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와 자기의 가족에게 영영한 인자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헤세드는 구약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가 6:8의 중심에 들어 있는 단어이다: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또한 시편 136편의 반복되는 후렴 속의 핵심 단어이다: “그 인자하심[사랑, 헤세드]이 영원함이로다.”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단어의 깊고 넓은 뜻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언약에 충실함”이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간주된다. 이 뜻은 20장의 대화 속에서 불거져 나온다. 20:14에서 요나단은 “여호와의 헤세드를 언급하였고, 20:8에서 다윗은 그들 사이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을 기초로 하여 헤세드를 요구하고 있다. (169.1)
 저자의 이야기 전개 속에서 이 이야기의 역할에 관하여 학자들은 사용된 자료들과 조잡한 편집 상태를 드러내는 몇 가지 점을 보려고 한다. 첫째로, 사울이 이미 여러 번 다윗의 목숨을 빼앗고자 했는데, 왜 지금 와서 다윗과 요나단이 다윗의 생명이 참으로 위태하다는 사실을 순진하게 의논하는가? 둘째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여러 번의 시도 속에서 사울은 다윗이 절기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도대체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가?(26, 27절). (169.2)
 그러나 각 등장 인물의 독특한 모습이 투영되든지 혹은 심화되는 가운데 이야기가 긴밀성이 있음을 뒷받침할 수 있다(Polzin, Samuel, 187-194를 보라). 예를 들어, 사울의 생애는 이미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신”으로 인해 이미 혼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이 이야기가 계속 연결된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사울의 시력이나, 기억력 혹은 둘 다 너무 악화되어서 골리앗과 맞서 싸운 자신의 병기 든 자를 알아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요컨대, 사울 생애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한 논리나 명쾌한 기억력을 사울에게서 기대해서는 안 된다. (169.3)
 그렇다면 사울의 다윗을 대적한 음모를 요나단이 몰랐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2, 9절). 요나단은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순진했다. 항상 순진하고, 직선적이고, 신뢰하는 그는 백성으로부터 늘 최선의 동기를 만들어 내었다. 심지어 정신이 나간 그의 아버지로부터도. 예를 들어 19:4에서 그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음모를 정면으로 맞섰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6절). 요나단은 그런 맹세를 믿을 사람이었다. (170.1)
 성질이 날카로운 사울, 순진한 요나단을 등장 인물로 하여 20장은 사울의 악한 의도를 확정짓고 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요나단이 실상을 깨달은 것이다. 이 장의 끝에 가서 그도 역시 다윗의 목숨이 위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기에서 사울의 화난 언동과 요나단을 창으로 찌르려던 시도 후에(30-33절) 요나단은 “맹렬한 분노” 속에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수치스럽게 취급한 것에 대하여 슬퍼하면서”(34절) 먹기를 거절하고 식탁을 떠났다. 그의 성격답게 요나단은 자기 자신보다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한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다윗이 오래 전에 알아버린 것을 이제서야 요나단은 알게 된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는 안전하지 않다. (170.2)
 다윗의 생각에 관하여 폴친은 이렇게 주장한다: “다윗은 이곳에서 심각해질 수가 없다—물론 그의 부재[20:5-8]에 관하여 요나단이 거짓말을 하게 하여 사울의 분노를 터뜨리게 함으로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요나단의 잘못된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작전이 아니라면”(Polzin, Samuel, 189). 그러한 결론은 사무엘상에서 거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도 저자는 다윗의 속생각을 우리에게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사울의 동기와 계획에 관하여는 다 일러주었다(18:8, 11, 21, 25). 심지어 일반 대중과 군대의 생각도 이야기 속에 드러나 있다(5, 16, 30절).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우리에게 드러나 있지 않다. 요나단도 역시 “해석”이 거의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마음이 개방되어 있고 정직하고 직선적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의 아버지의 “아사(餓死)” 서약이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그는 그 말을 했다(14:29). 그의 아버지가 그를 심문했을 때에, 그는 그가 한 일을 인정하고 결과를 감수하려고 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죽으리이다”(43절, 「새개정표준역」). (170.3)
 요나단의 과거의 기록과 다윗의 미래의 여정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놀라운 것은, 다윗이 자기 방어를 위하여 거짓말을 만들어 내었고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여 사울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한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들에 숨을 것이고, 요나단은 다윗이 베들레헴의 가족들의 제사에 참여하였다고 말하려 하였다. 참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 다윗에게 거짓말이 더 있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식자들은 다윗이 참으로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5, 24절은 다윗이 그 온 기간 동안 들에 숨어 있었다고 암시한다. 게다가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간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요나단이 사울에게 전해줄 알바이였다. (171.1)
 어쨌든, 그것은 다윗의 많은 거짓말 중 첫 번째였고, 요나단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사실상 그것이 요나단의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그의 맹약한 친구 다윗이 그의 입에 넣어준 것을 반복했을 뿐이었다(28, 29절). 사울의 난폭한 반응 때문에 요나단은 드디어 빛을 보았다[깨달았다—역자 주]. 더 정확하게는 어두움을 보았다. 다윗이 의도적으로 그의 친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그리하였는가? 우리는 겨우 짐작할 따름이다. (171.2)
 이 장이 마치면서 우리는 이제 다윗은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요나단은 다윗의 계획 속에 말려들어 가려고 하면서도 그의 투명성이 아직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의 언약은 무엇을 뜻하는가? 서로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가? (1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