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이미 완전하게 되었다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유익들에 대한 그의 논의를 결론 짓고 난 다음, 바울은 히브리서 10:14에서 깜짝 놀랄 만한 진술을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결코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는 즉각적이고 영구적인 완전을 가진 것 같다! (202.3)
 그러나 신자들의 완전케 됨에 대한 히브리서에서의 그의 다른 선언들을 연구해 보면, 그것은 일관된 양상(樣相)을 드러낸다-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관계하는 완전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얼마나 비뚤어졌는가를 폭로하는 양상. 우리는 그 첫 구절들을 7장에서 발견하는데, 그 곳에서 우리는 레위 제사장직을 통해서는 완전이 획득될 수 없다는 것(11절)과 “율법[옛 제도 하에서의 제사장직에 관한]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 것(19절)을 배운다. (203.1)
 히브리서 9:11-10:18에는 완전에 대한 다른 세 구절들이 있다. 첫 구절은 「새국제역」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9:9의 헬라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clear the conscience)” 대신에 “양심을 완전하게 한다(make perfect the conscience)”로 읽는다. 이 본문은 9:14와 분명한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읽게 된다. 즉, 9:9, 14에서 완전과 양심이 함께 묶여져 있고, 완전은 정결과 동등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3.2)
 완전에 대한 다음 구절은 10:1에 나타나는데, 거기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옛 제도의 반복되는 희생 제물은 “예배하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케”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다음의 두절들은 계몽적이다. 2절은 우리에게 만일 동물의 희생 제물들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더라면, “예배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3절은 반복된 희생 제물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9:9, 14에서와 같이 정확히 동일한 결론을 발견한다—곧 “완전”“정결”을 의미한다. (203.3)
 사실, 9:9, 14의 평행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새국제역」이 그것을 번역하지 못했을지라도, 9:9, 14에서와 같이 양심을 뜻하는 동일한 단어—헬라어 쉬네이데시스—가 10:2에 나온다. 「새국제역」이 “그들의 죄책감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리니”로 번역한 곳에, 원어의 독법은 문자적으로 “죄에 대한 양심을 더 이상 갖지 않으리니”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새국제역」에 종사한 사람들이 여기서와 9:9에서 정확히 사도의 사상을 파악하였다. 이 곳에서 그들은 완전한(perfect) 대신에 정결한(clean)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헬라어(완전과 양심에 해당하는)를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은 사도의 술어(述語)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신중한 히브리서 학도들을 방해하였다. (203.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책에서 말하는 완전의 의미를 본다. 그의 다섯 구절은 그 사상을 성소와 연결시킨다—그의 첫 두 구절(7:11, 19)은 일반적인 옛 제도에 그리고 그의 마지막 세 구 절들은 특별히 희생 제물에(9:9; 10:2, 14). 옛 제도 하에서는 완전이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동물의 희생 제물들은 내적인 것을 정결케 할 수 없었다는 단순 이유 때문이다. 만일 그것들이 할 수 있었다면,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드리셨다. 그리고 그 희생 제물은 옛 제도 하의 모든 피가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한다—그것은 양심의 정결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 하나의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10:14). (204.1)
 이러한 사상들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에 대하여 생각하는 맥락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여기서의 완전은 승리의 삶이나 죄를 생애에서 성공적으로 제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사상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이 구절에서 그것은 사도의 요지가 아니다. 여기서의 완전은 이미 성취 어떤 것, 이미 고정되고 확실한 어떤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우리가 성취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 (204.2)
 일찍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서, 우리는 완전이란 말이 그의 인간적 경험에 대하여 사용된 것임을 보았다. 그분에게 있어, 완전은 극복되어야 할 죄된 습관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제사장직으로의 성숙 과정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완전에 대한 히브리서 9-10장의 토론은 이 주제에 관한 현재의 많은 논증들이 어떻게 오해되었는지를 더 잘 보여준다. (204.3)
 죄와의 전투에서 싸우고 있는 많은 진지한 신도들에게, 히브리서의 가르침은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르침을 우리의 영혼 속에 새겨지게 할 때, 그것은 자유케 하는 말—소망과 보증의 말—로 임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전진하게 하는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으로 되돌아가도록 가리킬 것이다. (204.4)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그리고 그러한 기분을 갖는 것—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남녀들을 사로잡아 온 탐구이다. 구약의 사상의 절정을 이루는 한 구절에서, 선지자 미가는 해묵은 질문을 하였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6-7). (205.1)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매 선택권에, 우리의 마음은 부르짖는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송아지나 양의 어떤 희생 제물도 우리를 여호와의 면전에 서기에 족하도록 하지 못한다. 천천의 또는 만만의 양이라도, 우리의 자녀를 인간 제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어림없다! 왜냐하면 죄는 도덕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홧김에 내가 벌떡 일어나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양을 잡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제 죽은 양이 죽은 사람과 나란히 땅에 누워 있다! 천천의 또는 만만의 아니면 백만의 희생 제물이라 할지라도 나의 죄책감을 제거할 수 없다. (205.2)
 이것이 바로 완전과 양심에 대한 그 논리에서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옛 제도의 모든 준비물들, 해마다 반복된 모든 희생 제물들은 죄 문제의 완결을 결코 가져올 수 없었다. 진실로, 희생 제물이 반복하여 드려진 것 그 자체가, 문제는 아직도 거기에 있으며 백성들의 양심—또는 죄의식—이 해결되지 못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205.3)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제공해 주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셨다.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수십억의 희생 제물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그가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 우리의 궁지를 친히 담당하셨다. 그의 자기—희생은 진실로 “더 좋은 피”를 제공한다! 그의 희생은 우리를 온전케 한다—지금! 인간을 아무데도 못 가게 하면서 드려지는 끝없는, 반복되는 지루한 희생 제물들은 사라졌다. 영원히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 하나의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죄가 영원히 정결케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죄가 영원히 추방될 것이다. (205.4)
 탐색하는 질문들
 우리는 이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각별한 관심이 되는 영역으로 넘어간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는 하늘 성소에 대한 우리의 관심 때문에, 히브리서는 우리의 선구자들의 시대로부터 우리의 면밀한 주의를 끌었다. 이 책은 레위기의 대응물로서 구약의 의식들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적용한다. (206.1)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대속죄일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욤 킵푸르(Yom Kippur)—유대력으로 가장 거룩한 날—의 원형(原型)이 1844년에 시작되었다고 믿고 가르친다. 이 때 예수께서는 그의 둘째 칸 봉사에서 그가 이 땅으로 재림하시기 직전에 있는 심판을 시작하셨다. (206.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재림신자들 또는 이전의 재림신자들이 일부의 가장 날카로운 혹평들로써 이 독특한 교리들을 공격하였다. 최근 몇 년간, 데스먼드 포드(Desmond Ford) 박사가 과거의 비평들을 수집하여 그것들을 날카롭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서에서 강하게 쟁론을 벌인다. (206.3)
 포드에 따르면, 대속죄일은 히브리서의 논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도는 갈바리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일을 욤 킵푸르의 원형으로 묘사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승천시에 하늘 성소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고 그는 말한다. 만일 포드의 해석이 옳다면, 1844년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는 분명히 성경적인 진실이 아니다. (206.4)
 나의 판단으로는, 포드 박사가 히브리서의 대속죄일의 위치를 곡해하고 있다. 대속죄일이 논쟁에 돌입하기는 하지만, 포드가 제시하는 방식이나 범위의 논쟁은 아니다. 대속죄일은 사도가 그의 논증을 구성하는 바로 그(the) 구약의 핵심 모형이 아니다. 그것은 옛 제도를 형성하는 모든 의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논쟁은 갈바리/대속죄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갈바리/모세의 희생 제물로 나아간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희생 제물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발견한다: (2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