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두려움과 움츠림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굽실거리며 오지 않는다. 우리는 담대히 나아온다. 우리의 거룩한 담대함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두 가지 사실들에 달려 있다. 첫째, 그는 우리를 이해하신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그는 우리의 입장에서 사셨으며, 우리의 시련과 고통을 이해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둘째, 그의 피로써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켰던 옛 장벽들을 무너뜨리셨다. 그의 피는 죄로부터의 충분하고도 완전한 정결을 제공한다. 그의 피는 하늘 성전의 문을 연다—우리에게! (197.5)
 물론, 현재 우리가 실제적인 하늘 성소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들어가고, 믿음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11:1). 우리는 보기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궁극적인 실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중의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보증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10:22). (198.1)
 왜냐하면 그의 피가 죄로부터의 철저한 정결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이것이 그것의 두 번째 최고의 유익이다. 우리는 이 사상이 9:11-10:18에 걸쳐서 되풀이되는 것을 본다. (198.2)
9:14—그리스도의 피가 단순히 의식적 정결뿐만 아니라(9:13) 총체적 정결을 제공한다.
9:15—그리스도의 죽음은 첫 언약 하에서(즉, 모세의 성소 하에서) 범한 죄들로부터 백성들을 해방시킨다.
9:23—하늘 성소는 동물들의 피보다 더 좋은 희생 제물을 요구한다.
9:25-26—그리스도께서 다른 피가 아닌 자신의 희생 제물에 의한 피를 가지고 하늘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이 희생 제물이 죄를 없이 한다.
9:28—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단번에 희생되셨다.
10:10—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였다.
10:14—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를 영원히 완전하게 하였다.
10:18—그리스도의 희생은 다른 모든 희생 제물의 종결을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을 위한 결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마음의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어(10:22) 하늘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간다.
(198.3)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을 위한 결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마음의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어(10:22) 하늘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간다. (199.1)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으로 울려 퍼진다. 접근과 죄로부터의 정결에 대한 그것의 확증들은 그 힘과 아름다움에 있어서 비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령으로 감동된 이 책은 우리 주님의 위격과 구속 사업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99.2)
 그리스도의 피의 유익들에 대한 논의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9:16-17을 간략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절들에 대한 번역들은 매우 다양하다. 9:11-10:18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이해가 이러한 번역상의 차이점들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반면, 우리는 그들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199.3)
 번역상의 문제는 우리가 일찍이 보았던 헬라어 디아쎄케에 있다. 이 단어는 “언약(covenant)” 또는 “유언(will)”을 의미할 수 있다. 「새국제역」 번역자들이 히브리서의 거의 모든 곳에서 그것을 “언약”으로 번역한 반면에, 9:16-17에서 그들은 그것을 “유언”으로 번역한다. 15, 18절에서 그 말이 “언약”을 의미해야 하기 때문에—그들은 그렇게 번역한다—그들은 16-17절에서 저자로 하여금 그 말의 이중(二重) 의미를 가지고 말놀이를 하게 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두 절들에서 디아쎄케와 죽음을 연결함으로 인한 영향을 받아 이러한 사상의 노선에 동의한다. (199.4)
 나는 이러한 논리의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나 애매 모호하다. 그리고 8장에서 시작되었고 10:18에서 그것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언약 사상의 전개를 허물어뜨린다. 사도는 줄곧 언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두 절에서만 “유언”을 말하다가 곧 이어 언약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언약과 죽음을 연결하는 것이 정확한 그의 요지(要旨)이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새 언약을 제정한다. 15절이 그것을 확증하였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 . . 죽으사.” (199.5)
 완결(完結)—단번에
 옛 것과 새 것에 대한 히브리서의 대조가 다음과 같은 독특한 말로써 확연히 부각된다—한번에(once) 또는 단번에(once for all). 우리는 먼저 이 사상을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7:27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9:11-10:18에서 그 중심 사상을 이룬다. (200.1)
9:12—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9:26—그는 단번에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10:10—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다. 히브리서는 지상 성막에서의 계속적인 제사장들의 봉사를 하늘 성막에서의 그리스도의 단번 봉사와 생생히 대조하며 묘사하고 있다.
9:6—제사장들은 정규적인 봉사를 한다. 즉, 반복되는 봉사이다.
9:25—지상 성소는 반복되는 제물들을 요구하였다.
10:1—동일한 제물들이 해마다 반복되었다.
10:3—매년 희생 제물들이 대속죄일에 드려졌다.
10:1—제사장들은 동일한 제물들을 반복하여 드렸다.
(200.2)
 이러한 진술들에서 우리는 9:11-10:18에서의 사도의 세 번째 대조를 본다—하늘 성소의 모형에 한정적으로 접근하는 대신에 그것에 완전히 접근하고, 그리고 단순한 의식적 정결 대신에 죄로부터의 철저한 정결을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제물을 드리는 대신에 한 제물을 드린다. 결코 반복됨이 없는 영원한 하나의 제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의 제물. 한번에. 단번에. 임무를 수행하는 희생 제물. 모든 다른 희생 제물들을 멈추게 하는 희생 제물.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에. (200.3)
 “단번에” 대한 히브리서의 주석은 이미 일어난 것을 강조한다. 신학적 어법으로는 이것이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으로 불리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것. 그렇다. 사도는 실현되어야 할 것이 더 있음을, 즉 구원의 계획이 아직도 그 종국(終局, finale)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히브리서 9:27-28은 예수께서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실 때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강조는 이미 있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국제역」은 9:11을 다음과 같이 바르게 번역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여기 있는 좋은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 이에 비하여 「제임스왕역」은 “그러나 장차 올 좋은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라 한다. (200.4)
 우리는 9:23-26, 그리고 10:11-14에서 옛 것과 새 것의 비교와 대조를 볼 수 있다. 사도가 9:23-26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의 탁월한 성격과 유익들을 강조하는지 주시하라: (201.1)
옛 제도 새 제도
정결케 됨 정결케 됨
피로써 피로써
그러나
실체의 모형들만 참 성소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신을 희생으로 드림
반복적인 희생 제물들 단번에
지상의-가장 거룩한 천상의-하나님의 면전
(201.2)
 히브리서 10:11-14는 이러한 대조들을 더욱 확연히 부각시킨다. 이 단락에서 그는 8:1 이후로 흐른 다양한 논리의 요소들을 함께 끌어 당겨, 그런 후에 그는 그의 논증의 최후의 결정타로서 구약의 한 인용구로써 결론을 짓는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유익들을 전체 옛 제도와 대조하면서 요약한다: (201.3)
옛 제도 새 제도
모든 제사장(즉, 많은) 그리스도(오직 한 분)
서서(미완성의 일) 앉으심(완성됨)
드린다(계속적인 일) 드렸다(끝남)
동일한 희생 제물들 하나의 제물
반복하여 영원히
날마다 드림이 끝남
그의 종교적 의무들(한정적 접근) 하나님의 우편
죄를 결코 제거하지 못함 영원히 온전케 하심
(201.4)
 우리가 히브리서 9:1-10:18의 탁월한 제시를 숙고해 볼 때, 두 가지의 관찰이 떠오른다. 첫째,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고귀하며, 그 유익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본다! 전 인간 역사를 통하여 남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되고, 그 앞에 나오는 것이 부적합함을 느꼈다. 그들은 사제들과 무당들을 통하여, 순례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목욕 재계와 자기 스스로의 고행을 통하여 접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영광스러운 기별은 지금, 이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충만하고도 무한정한 접근과 우리의 무서운 죄로부터의 충만하고도 무한정한 정결을 소유하고 있다. (202.1)
 둘째, 본 발표에서는 매우 부적합한 것처럼 보이는 옛 제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그것을 세우셨다. 그것이 그 시대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길이었다. 여호와를 신뢰한 사람은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그분의 교훈을 행했다. 그 제도의 유익들—죄의 심각성에 대한 그것의 가르침, 피의 역할,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킴, 등등이 여기서는 취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우리의 현대 감각에 이상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구약 성소의 봉사를 깊이 생각지 않고 간단히 처리하는 것은 구약과 그 하나님—히브리서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