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전 논증을 통하여 피는 최고의 적극적 매체—하나님의 능력으로 충전된 매체—임을 알게 된다. 피는 정결케 한다; 피는 접근할 수 있게 한다; 피는 언약을 비준한다; 피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한다. (194.1)
 우리는 또한 피가 그리스도의 사업에 관한 논증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시하게 된다. 바울이 종종 “희생 제물”이란 말(예, 9:23, 26; 10:1, 3, 8, 10, 12)과 심지어는 “몸”이란 말(10:5, 10)을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그의 결정적 단언(斷言)을 위하여 “피”로 되돌아간다. 위대한 세 진술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 인한 우리의 무서운 궁지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준다. (194.2)
9:13-14“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94.3)
9:22“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10:4“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94.4)
 이러한 단언들은 마치 영적 격언처럼 서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속죄 계획을 우리로 얼핏 보게 해 주면서, 하나님의 생각의 창(窓)을 열어 준다. 논리적으로 이러한 진술들은 다음과 같이 함께 걸려 있다: (195.1)
기본 명제:
피를 통하여서만이 죄가 제거될 수 있다(9:22).

관련 명제들:
1. 동물의 피는 의식적, 외적 성격의 정결만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인 죄의 문제를 취급할 수 없다(9:13; 10:4).
2.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완결(finality), 곧 단번에 죄를 정결하게 한다(9:14).
(195.2)
 이러한 사상들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보고는 있지만 아직 보지 못한다. 다른 길이 없다—이것이 우리가 보는 것이다. 우리의 혼란에서 벗어날 다른 탈출구가 없다. 정결케 할 다른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195.3)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우리는 왜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의 제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195.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보이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 주셨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명백히 하셨다. 그 의미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왜 이런 길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저 이것이 그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그가 우리의 무서운 문제를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가 친히 해답을 제공하셨다. (195.5)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다. 그가 준비하신 것(provision)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부정에서 정결케 한다. (196.1)
 더 좋은 피에 대한 마지막 사상. 피란 말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그러나 그 이상으로서, 그의 죽음은 우리의 부정(不淨) 문제에 적용되었다. 피는 우리를 위하여 쏟아 부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리킨다—그러나 그 이상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정결과 치료를 가져다 주는 생명이다. 부정과 정결의 어휘가 우리의 양심 내면 깊숙이 반응을 불러일으키듯이, 더 좋은 피란 말은 어떤 다른 용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종교적 필요에 직접적으로 말한다. (196.2)
 히브리서가 피를 그 핵심 쟁론으로 거론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일부 재림신자들을 포함하여—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제시된 것은 피에 취한 이교(異敎) 신의 개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명백하게, 힘있게 말한다. (196.3)
 그리스도의 피의 유익들
 히브리서 9:11-10:18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루어 놓은 것이 언 듯 구약의 제도와 대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옛 것이 이루지 못한 것을—실상, 할 수도 없었다—예수님의 더 좋은 피가 이루었다. (196.4)
 옛 것의 두 가지 약점은, 우리가 일찍이 보았듯이, 그것의 한정적 접근과 한정적 정결이었다. 히브리서 9:1-10은 옛 제사를 이 두 결점들을 강조한 방식으로 개괄하였다. 그러나 이제 9:11-10:18에서 바울은 새 제도가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결점들을 어떻게 제거하는지를 보여준다. (196.5)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가 그로 하늘 성소—“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9:11)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고 곧 바로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9:24의 사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9:24). (196.6)
 우리는 저자가 모세의 성소와 급격한 대조를 그려내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서는, 일년에 한 날,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갔다. 그리고 사실인즉, 대제사장이 매년 대속죄일(Yom Kippur)에 지성소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조차도 그 실제의 접근에 있어서는 더욱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봉사한 성소는 궁극적인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197.1)
 하나님의 면전에 방해를 받지 않고 접근한다는 것—이것이 9:11, 12, 24의 핵심이다. 이 접근은 자신의 더 좋은 피를 제공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8:1에서 시작한 그의 긴 논의를 요약하면서, 사도는 10:19에서 선언한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97.2)
 이 절들은 4:16의 확증을 반향하고 보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실, 4:16“나아가다(approach)”로 번역된 말은 10:22“나아가다(draw near)”와 동일한 단어이다. 헬라어 프로스에르코마이(proserchomai)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면전 바로 앞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197.3)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대제사장들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매년 오직 하루만 그 특권들을 가졌던 것에 비해, 우리는 그것을 일년 내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참 것의 모형에 불과했던 지성소에 들어간 반면, 우리는 하늘의 실체에 들어간다.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