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딜레머-부정(不淨)
 히브리서 1:3에서 사도는 아들의 지상(地上)의 봉사를 “그가 . . . 죄를 정결케 하셨다”는 말씀으로 요약하였다. 이제, 그가 그 사역을 논할 때, 그는 그것의 정결케 하는 측면을 강조한다. (190.3)
9:13—동물의 피는 외적으로 부정하게 된 자들에게 의식적(儀式的) 정결(淨潔)을 가져온다.
9:14—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 정결케 하신다.
9:22—구약의 제도하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었다.
9:23—하늘의 것들의 모형들이었던 지상의 것들은 동물들의 피로써 정결케 되었으나, 하늘의 것들은 더 좋은 것을 요구하였다.
10:2—만일 동물의 희생 제물들이 철저한 정결을 제공하였더라면, 그 제물들이 매 해 드려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90.4)
 9:11-10:18의 심오한 신학적 사유(思惟)로 들어가는 이 구절들에다 우리는 곧 이어 나오는 다음과 같은 권고의 이 구절을 덧붙여야 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190.5)
 그런 다음,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인간의 문제—죄가 우리에게 가져온 딜레머—는 바로 우리가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부정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갈 수 없다. 외적 또는 의식적 부정으로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 같이, 전신을 감싸고 있는 우리의 부정이 하늘의 실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191.1)
 가끔 히브리서에서 다른 용어들(이를테면, 속량[ransom])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1:3이 벽두(劈頭)에서 암시하였듯이, 일차적인 묘사는 정결이다. 9:22도 예외는 아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용서”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아페시스(aphesis)인데, 그것은 석방(釋放) 혹은 제거(除去)의 사상을 지니고 있다. 본 절에서 사도는 그것을 “정결”이라는 말과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의미는 유사해야 한다. (191.2)
 인간의 딜레머에 대한 이 진술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처음으로 대면할 때, 그들을 놀라게 한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책들-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더 익숙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 편지서들에서 구속의 계획에 대한 바울의 발표는 다른 용어에 집중되어 있다-칭의. 칭의는 법정 모델을 암시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범법자로 고소되어 서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한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서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사면된다. (191.3)
 사실상,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일련의 모델들 또는 은유들을 소개하고 있다. 각 모델은 매일의 평상 생활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용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지불하기 불가능한 빚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191.4)
 화목은 전혀 다른 모델을 제시한다. 이것은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 나온 것으로서, 거기에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화해 불능의 원한으로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使役)은 불화를 제거하고,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와 화해된다. 다른 모델로는 속죄(값을 지불하는 것), 구속(완전히 사는 것), 해방, 양자(養子), 성화(하나님의 용도를 위한 구별 또는 헌신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성소 용어), 그리고 잃음/발견, 등이 있다. 매 경우에 죄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고, 매 경우에 그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무서운 딜레머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출구를 발견한다—그는, 그 자신 안에서,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해결을 제공하신다. (192.1)
 인간의 종교들을 연구하는 학도들은 우리의 첫 조상의 자녀들이 아직도 씨름하고 있는 부정(不淨)의 보편적 의미를 관찰하여 왔다. 법정 모델이 낯설지도 모르는 사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분 앞에서의 이러한 부정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인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고백의 언어를 추적하였다. 그는, 어떤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더럽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의 정결이 필요하다. (192.2)
 이와 같이 히브리서는 보편성을 띄는 방식으로 인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히브리서의 부정과 정결의 언어는 구약의 레위기를 반향(反響)한다. 그것은 레위기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레위기를 신약의 상응물(相應物)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멀리까지-각 곳의 모든 이에게-미친다. (192.3)
 이 언어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우리에게도—공명(共鳴)한다. 믿는 우리는 제임스 니콜슨(James Nicholson)과 함께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나를 씻으소서. 그러면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또는 우리가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와 함께 이렇게 노래한다: (192.4)
저기 피로 채워진 한 샘이 있네
임마누엘의 정맥에서 길러온.
하여 죄인들은 그 양양한 물 밑으로 뛰어들었네
그들의 모든 죄의 흔적들은 사라지고.
(193.1)
 이와 같은 찬송가들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것들은 우리의 죄 문제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실상을 표현해 준다. (193.2)
 부정과 정결의 언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속 사회의 표현들 속에서 아직도 다음과 같은 그 반향(反響)과 공명(共鳴)을 발견한다: “더러운 돈,” “추한 이야기,” “실토하기(coming clean),” 그리고 “더러운 정치.” 상담원들이 가끔 더러움에 대한 압도감(壓倒感)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특별히 미국에서는 거대한 목욕탕과 엄청난 물 소비로 나타나는 청결에 대한 열정이 있다-공기와 물의 오염에 대한 우리의 심한 불쾌 의식은 고사하고라도. (193.3)
 히브리서는 그 놀라운 적용과 함께 우리의 시대에 말한다! (193.4)
 더 좋은 피
 사도가 부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인간의 딜레머를 제시하듯이, 그는 빼어난 정결의 매체—피를 소개한다. 그러나 아무 피라도 되는 것이 아니고, 외적 또는 의식적 정결은 제공하지만 양심을 정결케 하지 못하는 동물의 피는 분명히 아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다른 피들보다 더 좋은 피에 대하여 말한다—그리스도의 피. (193.5)
 우리는 사도가 어떻게 본 절과 그 이후 절의 핵심 포인트에서 그의 논증의 방향을 피로 전환하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193.6)
9:7—구약의 대제사장은 결코 피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9:12—그리스도께서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로써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9:13-14—동물의 피는 의식적 정결을 제공하나,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의 정결을 제공한다.
9:18-21—첫 언약은 피로 비준되었다.
9:22—피 없이는 죄의 제거가 없다.
9:25—그리스도께서는 다른 피로써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지 않았다.
10:4—동물의 피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10:19—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하늘 성소에 들어갈 확신을 가진다.
10:29—새 언약의 피를 멸시하는 사람은 엄한 벌을 받는다.
11:28—모세는 유월절을 지키고 피를 뿌렸다.
12:24—예수님의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