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역사 제3장 헬레니즘 시대의 점성술에 대하여 (점성술이 그리스에 전래된 과정) 제5절 버가모와 코스 섬에 세워진 바벨론 망명 정부와 점성 학술원
 1. 갈대아인들의 반란과 도피
 이제 신과 네르갈 신의 신관(사제장)들은 마르둑 신의 사제장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바벨론 도성을 재빨리 빠져 나와 하란으로 도피했었다. 바벨론 판테온 사제단의 최고 권좌를 회복한 마르둑 신 숭배자들은 후환을 염려하여 하란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그 기미를 알아채고 소아시아의 버가모에 도주해 버린 뒤였음을 알게 되었다. (213.1)
 W. B. 바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213.2)
“갈대아 술사들은 바벨론에서 오랜 시일 동안 번영을 향유했었다. 군주에 의해 임명된 대사제는 72명의 사제단을 다스렸다.... (메디아-페르시아에 점령된 후에) 패전한 갈대아 사람들이 소아시아로 도망하여 버가모에 그들의 중앙 사제단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또 정방형으로 된 바벨론 석재로 된 여신 팔라스(Pallass) 상을 가져왔다. 바로 여기서 그들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통치하면서 그들의 종교 제식을 계속 거행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태평 정세에 항거하는 계략을 수립하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그리스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1)
(213.3)
 갈대아의 점성술사들은 여기서 느부갓네살 시대의 화려했던 옛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화를 돌아보면서 제국의 재건을 염원하였다. 이들은 이곳 버가모에서 망명 정부를 건설하고, 바벨론 종교 의식을 수행하면서 먼 훗날을 내다보며, 이 신비로운 밀의를 계승시켜 줄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점성 학술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또 한편으로는 본국 첩자들과 내통하면서 독립 전쟁을 위한 반란을 유발케 했으며 이를 원격 조종했었다. 그리하여 B.C. 480년에 크세르크세스(486-455 B.C.)는 이 민중 반란의 분풀이로 바벨론 주민이 자랑하는 바벨 7층 신전탑 에-테멘-안-키(E-temen-an-ki)를 파괴해 버렸다.2) 다시 반란자들은 대부분 이곳 버가모로 대거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버가모는 메소포타미아 종교 의식의 중요한 고장이 되었다.3) (213.4)
 

버가모에 있는 제우스 제단. 독일 베를린 박물관 소장
(214.1)
 페르시아 제국은 이 바벨론 사제들의 망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소아시아를 침략했다. 그러므로 갈대아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점성 학술원을 에게해의 코스 섬에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4) 그러는 동안 새 강자 알렉산더의 등장으로 정치 판도가 달라지면서 갈대아인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들 나름대로 이 신비스러운 점성술을 토착화시켜 왔다. 이제 점성술은 헬레니즘의 물결을 타고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인들에게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는데, 그들 중 헬라의 최고 지성인들의 집단 퀴레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상륙하게 되었다. (215.1)
 2. 퀴레네 학파(Cyrenes)의 관심
 동방의 신기한 점성의학을 보급하는 이들 갈대아의 망명자들을 보호하려는 소 아시아인들은 그들을 섬멸하려는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침략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헬라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페르시아 제왕들은 헬라를 토벌하지 않고서는 그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사태는 세 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켰고 알렉산더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페르시아는 세계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갈대아의 점성술은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인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유명한 점성술사는 베로수스(B.C. 3세기 사망)였으니, 그는 그리스어로 바빌로니아의 역사를 처음 저술한 역사가이기도 했다.5) (215.2)
 시드니의 성 앤드류 대학(St. Andrew's College)의 신약사 교수 앵거스(Samuel Angus, A.D. 1881-1943) 박사는 그의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16.1)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군들이 유프라데스 강변의 사제단 조직을 폐쇄시켜 버렸던 그 시대부터 바빌로니아의 이 별을 숭상하는 종교의 감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벌써 수용 태세로 변한 토양, 곧 그리스 세계에서 급속히 자랐으니 이는 이들 철학자들이 천체들에게 최고의 영예를 부여해 왔었기 때문이다.”6)
(216.2)
 “바빌로니아의 점성학자 키데나스(Cidenas)는 B.C. 382년경에 1삭망월을 29.530594일로, 1회기년을 365.236일”로 정하여 사용하고 있었다.7) 뿐만 아니라 7일 1주 제도의 요일의 명칭 등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천문학적 문헌 등은 플라톤(429?-347 B.C.)이나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에게 큰 감명을 주었었다.8) 이에 대해서 애굽학의 최고 권위자 올브라이트(A.D. 1891-1971)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216.3)
“갈대아인들의 점성학적 기록 문헌들이 과학적으로 중요함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잘 알려져서 그는 자기 제자 칼리스테메스(Callisthemes)에게 이 점성술을 연구하도록 위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B.C. 331년에 이것을 조사 연구 했었다.”9)
(217.1)
 

‘이소스 싸움’ 또는 ‘알렉산더와 페르시아군의 싸움’. 폼페이에서 발굴된 회화의 모자이크.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보관
 그런데 헬라인으로 이 점성술사들로부터 천문학을 익힌 가장 뛰어난 학자는 유독소스(라틴명-Eudoxus, 408-335 B.C.)일 것이다.10) 그는 플라톤의 제자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논리학을 배웠다. 그는 갈대아 점성학에 매료되어 이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갈대아인들의 감화로 천동설이긴 하나 항성의 운행을 헬라의 과학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그리스 천문학의 비조가 되었다. 그는 헬리오폴리스에서 가르쳤고 크니두스(Cnidus)에 천문대도 세웠다. 이리하여 이 시대는 갈대아 사람들이 매우 존경받았다. 독일태생 마운트 홀리욕(Mount Holyoke) 대학 역사 교수 크레이머(F. H. Cramer, 1919-1954)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218.1)
“유독수스(B.C. 4세기)시대에 있어서 ‘갈대아’인이란 말은—키케로의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점성술사만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사제장 계급도 포함해서 쓰여졌고, 심지어 일반적으로 그 지역 백성들까지도 포함해서 쓰여졌다.”11)
(218.2)
 W. F. 올브라이트는 계속해서 증언했다: (218.3)
“수십 년 후에 바빌로니아 사람 대석학 베로수스가 B.C. 280년경에 코스 섬에서 그리스 점성술 학교를 세우는 기초를 닦아 두었다. 그는 이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점성술 교재를 그리스어로 최초로 번역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 사업이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뒤늦게 쉬나벨(Schnabel)에 의해 그 사실이 알려졌다. 포시도누스(Posidonus)의 제자 샤움베르거(Schaumberger) 즉 두로(Tyre)의 게미누스(Geminus)가 일찍이 B.C. 1세기에 바빌로니아의 점성술 일람표(성좌표)를 그리스어 판으로 번역서를 출판했다. 약 B.C. 250년경 수디네스라 이름하는 저명한 갈대아의 점성술사요, 저술가가 버가모에서 활약했다. 분명히 갈대아의 점성술은 처음부터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계에 수용되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힙파르쿠스까지 그 숙달자가 되었던 것이다.”12)
(218.4)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그림. 바티칸궁 서명실 벽화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