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와 안식일 제 14 장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2)
 안식일: 사람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총명이 다시 돌아오는 날
 제칠일 안식일이 에덴의 날들을 대표하는 날이라면, 6일은 사람아들이 에덴 밖으로 쫓겨나 살아가는 삶을 대표하는 날들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에서 쫓겨나 그 모든 영광을 잃고 비천한 목숨으로 보낸 날 같은 세월이다. 사람아들이 “땅의 중앙에서 높이 자란 큰 나무”(단 4:10-12) 같았던 삶을 빼앗긴 세월이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늘아래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던” 나무의 삶을 빼앗긴 세월이다. (148.1)
 어찌하여 사람아들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제칠일의 세월에서 쫓겨났는가. “어찌하여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가”(사 14:1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하는 안식일 신앙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2-14) 하였기 때문이다. 니므롯과 느부갓네살처럼 나의 “성”을 쌓고 나의 “집”을 건설하여 “나의 위엄의 영광을 나타내리라”(단 4:30) 하였을 때, “한 순찰자,” 곧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와서 “외쳐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해쳐서 그 짐승들과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의 그루터기만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두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게 하였던”(단 4:13-15) 것이다. (148.2)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만으로 땅에 남겨지고 철과 놋줄로 동여진 모습, 청초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생명의 분량을 함께 하는 모습은 사람아들의 추락된 위엄과 영광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쇠잔하고 탁해진 사람의 생명의 모습이 또한 이러하다. 창조 당시의 그 웅건 하고 활력이 넘치며 맑고 밝고 고른 그 생명 그 숨길은 찾아 볼 수 없고 호흡의 뿌리의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것 같은 호흡, 철과 놋줄로 묶여진 것 같은 힘들고 탁한 호흡, 들 청조 가운데서 하늘의 이슬에 젖고 사는 짐승의 모질고 슬픈 목숨과 같은 그런 호흡, 그런 생명이 6일의 삶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호흡이며 생명이다. (149.1)
 사람 아들의 생명과 호흡의 모습만이 이토록 처참해진 것이 아니다. 사람아들의 “마음이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않게 되었다.”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단 4:16).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무지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여야 하게 되었다”(단 4:15). “일곱 때까지”라 함은 인생이 짐승으로 더불어 그 운명을 같이 하여야 하는 삶의 날들의 분량이다.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단 4:17)의 세월이다. 따라서 제6일, 곧 예비일은 “그 분량”이 다하고 “일곱 때”를 지나는 날이다. (150.1)
 그 반면 제칠일 안식일은 짐승의 분량이 다하여 사람아들의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단 4:34) 날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처럼 사람아들인 내가 짐승의 삶을 끝내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단 4:34) 날이다. 사람아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마치 옛 유업이 그 본 족에게로 돌아가듯 옛 총명이 다시 사람아들에게로 돌아오는 날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며 그 권세가 영원하고 그 나라가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4) 하고 고백하는 총명이 사람아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날이다.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야 하는” 깨달음이 “내게로 다시 돌아오는” 날이다. (150.2)
 그리고 제칠일 안식일은 이 총명과 함께 사람아들의 마음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돌아오는”(마 15:27) 날이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는” 날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행 1:6) 때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마 6:10) 날이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날이다. 그가 “큰 음성으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라고 소리치는 날이다. 하늘의 “이십 사 장로들의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계 11:15-17) 하는 날이다. (151.1)
 또 제칠일 안식일은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다 이루었다”(계 12:10)고 소리치는 날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가 다 이루었으므로” “우리 형제를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났다”(요 12:31)고 외치는 날이다. (151.2)
 하늘의 큰 음성이 가로되 이제 “더 이상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롬 6:14) 너희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롬 6:18) 하고,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한 백성이라”고 하는 날이다. 우리를 죄의 나라에서 해방하고 하나님 나라의 왕좌에 앉히는 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당당히 들어서는 날이다. 하나님의 국권이 견고히 서는 날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빛나는 날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는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라”(벧전 2:5)고 호소하는 날이다. (152.1)
 그리하여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람아들인 우리가 이 외침에 화답하는 날이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딤후 4:18),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 6) 하는 날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는 날이다. (152.2)
 안식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날
 생각해 보면 제칠일의 밖 6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알고 놀라고 찬양하는데 실패한 날들의 이름이다. 우리가 무관심으로 눈이 어두웠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마음이 미련했던”(롬 1:21) 날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생에게 바라시는 큰 기대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심이다”(행 17:20). 사람으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찾게 하심”(마 6:33) 이다. 그리고 이것이 안식일 계명의 중요한 목적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너희는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눅 12:31).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발견해야 한다. (152.3)
 진실로 이 세계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롬 1:19)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영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의 숭고하고 놀라운 비밀로 가득 차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롬 1:20) 가득 차 있다.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창 3:3)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시 19: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 말한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고 있다”(시 19:1).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분 안에서 숨쉬고 살아간다”(창 17:27, 28). 그의 나라와 그 의도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니 하늘에 있는 것도 바다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네게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신 30:11-14). (153.1)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없다. 제칠일의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지식이 없다. 슬프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호 4:6).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4)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 제칠일 안식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 (154.1)
 진실로 인간은 손바닥 하나로 눈을 가려 눈 밖의 천지를 보지 않을 수 있듯이 인간의 허망한 마음 하나로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고 슬픈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신비와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신비와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험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경험이 찬양과 감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54.2)
 진실로 보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고 아는 것이 아니다. 본다고 해서 보는 것도 아니다. 듣는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이다”(사 60:10; 마 13:15). 아는 것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마음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눈멀었으면 눈을 뜬들 무슨 소용이며 마음이 귀먹었으면 귀가 열려 있는 들 무슨 소용인가. “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다”(사 42:20) (154.3)
 우리의 6일은 이러한 날들이다. 6일의 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황폐되고 쇠퇴해진 날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모습의 날이다. 진정한 지식의 “줄기와 가지와 잎사귀와 열매가 다 잘려나가고 털려 나간” 형체의 날이다. (155.1)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마 13:16, 17). 제칠일 안식일은 우리에게 그 보고 들음이 허락된 날이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저희에게 허락된”(마 13:11) 날이다. 천국의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보고 들어 깨닫는 것이고(마 13:11),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롬 1:21). (155.2)
 그러나 “이 백성은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다”(사 6:10).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렘 5:21; 마 13:13).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저희에게 허락이 되었은들”(마 13:11) 그것이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155.3)
 문제는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도 영광도 그의 명하신 말씀도 먼 하늘이나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심히 가까이 있다.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다(신 30:11-14).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가 “심히 가까이” 네 입에, 네 마음에 있다(신 30:15). 안식일의 나라가 네 입과 손과 발(사 58:13)과 네 마음에 있다. 심히 가까이 있다. (1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