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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 하나님의 휴전의 날
 10세기 프랑스에 중앙 정부가 무너지면서 지방 제후들의 개인 전쟁이 늘어났다. 제후들끼리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지방 제후들이 산적들처럼 상인들과 농부들과 순례자들과 성직자들과 부녀자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들의 노략질은 시도 때도 없었다. 교회와 수도원들까지 이들에게 포위되고 약탈당했다. 교회는 이렇듯 비통한 사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10세기말에 세 차례의 교회 회의를 통하여 비전투요원과 교회 건물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11세기 프랑스에 “하나님의 휴전”이라는 것이 선언되었다. 평일 중 특별한 날과 교회의 특별한 성일에 한하여 전투를 금지시킨다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대로 이행된다면 일년 전체의 전투일을 4분의 1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하나님의 휴전”은 폭넓게 준수되지 않아서 기대한 만큼 실효를 얻지 못했다. (130.1)
 안식일은 우리 모두가 무조건으로 일을 중지하는 날이다. 일을 중지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 휴전을 시작하게 하는 날이다. 우리는 일을 중단함으로써 투쟁을 중단한다. 전쟁을 중단한다. 일손을 놓으면서 우리가 일을 중지함으로써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잔혹한 경쟁이 휴전으로 들어간다. 우리 사이에 평화가 시작된다. 나와 이웃 사이에 휴전의 평화가 시작되고 약탈하고 짓밟는 인간과 짓밟히고 신음하던 생태계 사이에 휴전의 평화가 시작된다. 약한 자를 짓밟던 사회적 질서와 약한 자 사이에 휴전의 평화가 시작된다. 인간과 탐욕 사이에도 휴전이 시작된다. 인간과 일 사이에도 휴전의 평화가 시작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그리고 인간의 내부에 평화가 시작된다. 안식일은 이러한 날이다. (130.2)
 안식일의 이 휴전과 이 평화는 사람의 호의나 사람의 명령이나 사람의 노력에 의한 휴전이나 평화가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담보하신 휴전이요 평화이다. 나와 너의 싸움에 하나님이 끼어 들어 생긴 휴전이다. 나와 생태계의 싸움에 하나님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루어진 평화이다. 나와 나 사이의 싸움에 주님이 끼어 들어와 피투성이가 되심으로써 이루어진 휴전이고 평화이다. 견고한 평화이다. 십자가만큼 견고한 평화이다. 강 같은 평화이다. 로마의 평화가 땅의 평화라면, 안식일의 평화는 하늘의 평화 같은 평화이다. 얕은 샘물의 평화가 아니다. 깊은 샘의 평화. 강 같은 평화이다. 마셔도 마셔도 곧 목마르게 되는 평화가 아니다. 왔는가 하면 곧 사라지는 평화가 아니다. 말만 평화이지 영혼의 깊이에서 느껴지지 않는 평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곧 큰 날에 서서 무엇이라 외쳐 말씀하셨는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요 7:37) 하셨다. 안식일의 주님께로 와서 “마셔라” 하셨다. “평강의 왕”에게 와서 마시고 “평강의 날”에게 와서 마셔라 하셨다. 안식일의 평강에서 마시는 자는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에서 마시는 평강은 물론 히브리서 4장에서 말했듯이 “믿음”에서 마시는 평화이다(히 4:2; 3:12). 예수를 믿는 평강이다(요 7:38). (131.1)
 예수님이 그 목숨을 불어넣으며 우리에게 끼친 평안
 따라서 안식일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 같이 단순히 전쟁이 없는 평화가 아니다. 안식일의 평화는 화평과 안녕과 조화와 안전과 인식의 “샬롬”이다. 안식일의 평화는 샬롬의 평화이다. 사람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속 사람이 치유되는 평화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치유되는 평화, 사람의 자기의 몸과 마음의 사이에서 치유되는 평화이다. 몸의 어긋났던 질서가 치유되고 마음의 어긋났던 질서가 치유되는 평화이다. 몸과 마음 사이의 어긋났던 관계가 치유되는 평화이다. 가정의 관계가 치유되는 평화이다. 사람의 온 “영과 혼과 마음이”(살전 5:23) 흠 없이 온전해지고 서로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는 평화이다. (132.1)
 또 안식일의 평화는 “메누하”의 평화이다. 메누하는 안식의 또 다른 히브리 낱말이다. 시편 23편 2절“쉴만한 물가”에서 “쉴만한”이 메누하이다. 안식일은 “메누하의 물가” 같은 날이다.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푸른 초장 같고 쉴만한 물가 같은(시 23:2) 평안이 안식일 평안이다.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평안이다. 내가 비록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평안이다. 죽음의 음산한 계곡을 지나갈 때에도 나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평안, 곧 주의 지팡이 같고 막대기 같은 평안이다. (132.2)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는” 평안이며(요 14:27) 여섯 날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 평안이다. 세상이 줄 수 없고 여섯 날이 줄 수 없는 평안이다. 하나님이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신 평안이다”(출 31:17). “하나님이 제칠일에 숨돌린 평안이다”(공동번역, 출 31:17). (132.3)
 안식일의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이다. 예수님의 “나의 평안”(요 14:27)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평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또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1, 22) 하셨다. 안식일의 평강은 예수님이 숨 불어넣듯 우리에게 끼치신 평안이다. 예수님의 숨 같은 평안이다. 예수님의 목숨 같은 평안이다. 예수님이 숨넘어가면서 우리에게 끼친 평안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면서 주신 평안이다(요 20:21, 22). 성령 같은 평안이다. 그래서 강 같고 깊은 샘 같은 평안이다(요 7:37, 38, 39). 안식일은 이같은 평강이 우리에게 강같이 흐르고 우리 사이에 강같이 흐르는 날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의 평강을 대표하는 날이다. (132.4)
 안식일은 이러한 날이다. 사람의 “심령이 평강을 얻는 날”(렘 6:16)이다. 사람의 “기운이 충만하여 평강하며 안일하는”(욥 21:23) 날이다. 하나님이 “평강을 위하여 우리에게 오시고”(삼상 16:4) “평강의 왕으로”(사 9:6) 우리에게 오시는 날이다.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평강을 강같이 주시는”(사 66:12) 날이다. “악한 자도 소요를 그치고 곤비한 자도 평강을 얻는”(욥 3:17) 하나님의 날이다.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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