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제사장(하늘 성소의 예수 그리스도) 제 12 장 하나님의 남은 교회
 이러한 말씀들은 신뢰할 수 없고 믿기 어려운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궁극적으로 바깥 어두움에 던짐을 당하게 될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거룩한 단상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쳤던 사람들과 그 의자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라고 선포하셨다. (234.1)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가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알고 순종할수록 그의 믿음과 경험은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하셨다. 사람이 하루에 빵 한 조각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할 수 있으나, 그의 건강과 힘은 엄격히 제한되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두뇌와 몸에 필요한 더 적절한 음식을 공급한다면 그는 그 자신과 그의 가족, 그의 사회를 더 이롭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죄를 극복하고 건전한 그리스도인 경험을 발전시키는 힘을 공급하고자 한다면, 신자는 최소한의 빈약한 분량으로 만족하지 말고 모든 말씀에 의해서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성경의 가르침 중 아무 것도 폐하여질 수 없다. 성경 교리는 오류와 기만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서 있는 것이다. (234.2)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은 분리할 수 없는데 성경을 우리 손에 들고서 오류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그의 생애가 바르기만 한다면 무엇을 믿든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애는 믿음에 의해 형성이 된다. 만일 빛과 진리가 우리가 미칠 범위 안에 있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들을 수 있는 특권을 계발하기를 등한히 한다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597).
(234.3)
사도 바울은 마지막 시대를 내다보면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며”라고 하였다. 그 때가 이미 도래했다. 대중들은 성경의 진리를 원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욕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은 그들이 사랑하는 기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오직 성경만을 모든 교리와 개혁의 기초로서 삼을 한 백성을 지상에 가지실 것이다. ∙∙∙ 어떠한 교리나 원칙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지지함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는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94-595).
(235.1)
 사랑—더욱 뛰어난 길
 오늘날 “사랑”은 모든 믿음의 신앙인들 사이에 좋아하는 말이다. 이것은 연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공통 분모라고 말해져 왔다. 그리스도 인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 절하한다는 것은 나에게 거리가 먼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성경과 함께 서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사랑이 세상에 주어지는 마지막 자비의 기별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235.2)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다. 사람들은 그분의 품성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잘못 이해되고 잘못 해석되어 왔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별이 선포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그것의 영향 안에서 빛나고 그것의 능력 안에서 구원하는 기별이다. 그분의 품성은 알려져야만 한다.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그분의 영광의 빛, 그분의 선하심, 자비, 그리고 진리의 빛이 비쳐져야만 한다.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라!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자비의 마지막 광선, 즉 세상에 주어질 마지막 기별은 그분의 사랑의 품성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들 자신의 품성과 생애 가운데 그들은 그들을 위해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만 한다(실물 교훈, 415, 416).
(235.3)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두 계명을 지키기를 원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갈 5:22)이다. 이들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 안에 참여하게 된다. 이 사랑은 의로운 사랑이다. 그것은 신뢰되어질 수 있다. 사랑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신 말씀의 의미 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계명의 준수를 요구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은 단지 마음의 선한 감정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생애를 변화시키고 바뀌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조화로 인도한다. (235.4)
 오늘날 인기있는 종교의 대부분은 하나님과 가깝다는 것은 강렬한 느낌, 열정, 그리고 때로는 황홀경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한 종교는 신자들을 초자연적인 것에 참여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사랑만이 절대적인 것이고 그밖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된다. 사랑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사랑이 기독교이고, 기독교가 사랑이다. 그러니 누가 사랑에 대항하여 논쟁하기를 원할까? 확실히 모든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그들을 연합시키는 어떤 것을 공유할 것이다. (236.1)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떠한 종류의 하나님을 사람이 사랑하는가? 어떠한 종류의 진리를 사람이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상관이 없는가? 교회는 두 극단을 경계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성경의 교리적 진리를 버리거나 등한히 하고, 또 하나님을 쫓는 내적인 감정과 진리를 추상적 지성으로 다루는 것이다. (236.2)
 성경의 가르침과 교리를 폐함으로 특징지워지는 다양한 종교와 종파가 있다. 지금은 성경 연구에 지적인 나태함의 시대이다. 교회에 최대의 위협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에 교회가 실패하는 것이다. 남녀들은 성경의 진리에 굶주리고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근이 있다. (236.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 12).
(236.4)
 정서적 황홀경은 모두 너무나 자주 나태한 마음들의 피난처이다. 그것은 사고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것은 빛을 꺼버림으로 모든 사람을 연합시킨다. 그것은 성경 진리에 관하여 안일한 생각을 갖게 한다. 자, 만일 사람이 진리와 구원을 어떤 감정적 경험과 일치 시키고자 원한다면 그것을 막을 다른 방도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만일 사단이 어떤 황홀경과 좋은 감정의 상태 가운데 빛의 천사로서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리스도가 이 점에 있어 판단하신다면 성경으로 한 그분의 계속적인 호소인 “기록되었으되”는 마귀 그 자신을 드러내며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실을 붙잡게 한다. 만일 하나님 말씀에 의하지 아니하면 어떤 표준으로 사람들이 사랑, 감정, 내적인 증거를 시험할 수 있는가? 죄된 인간은 진리를 곡해하는 데로 기울어지기가 쉽다. 이 마지막 날에 있어서 남은 교회는 하나님과의 그의 교통이 진실됨을 확실하게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리와 신실함이 아주 필수적인 그 점에 있어서 위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36.5)
하늘에서 대쟁투의 시초로부터 하나님의 법을 뒤엎는 것은 사단의 목적이 되어 왔다. 거룩한 규례에 경멸을 가져오는 것을 찾으면서 사단은 성경의 교리들을 왜곡시켜 왔으며, 그래서 오류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수천의 사람들의 믿음 안에 침투해 왔다. 진리와 오류 사이의 마지막 투쟁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오래 계속되어 온 투쟁의 마지막 싸움이다. 이 싸움 가운데 우리는 이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의 율법과 여호와의 원칙 사이의 싸움이며 성경의 종교와 거짓 전통 사이의 싸움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582).
(237.1)
 거짓 영들에 의한 속임을 피하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진리가 단지 그것을 읽음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를 마음속에 기록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에 기록된 진리는 성경에 있는 그러한 것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237.2)
 한 사람이 행복, 기쁨, 그리고 사랑이 신앙의 전부임을 발견한 어떤 특정한 교회의 감정과 흥분에 관하여 최근에 보고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느끼는 한 이것이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만일 그대가 그대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면 거기에는 성경 교리 가운데 차이점을 생각해 볼 더 이상의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일곱째 날이나 첫째 날, 어느 날을 지키는 것에 대한 논쟁은 왜 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이 폐해졌는가 하는 것을 알려는 토론은 왜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든지, 또는 지금으로부터 오천 년 후에 오시든지 무슨 차이가 있는가? (237.3)
 바로 이러한 태도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 말씀의 근본적 진리의 믿음으로부터 얼마나 생략할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성경 교리들을 기독교 믿음에 대한 사람의 간략한 정의 아래 남겨 둘 수 있는가? 만일 사람이 넷째 계명의 중요성을 부인한다면 왜 계명 모두를 부인하지 않는가? 실제 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게 살면서 그것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성경의 다른 주장들은 거절하면서 “사장”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가? (238.1)
 불행하게도 우리는 성경에 적당히 관계없는 신앙의 형태를 우리 시대에 발전시켜 왔다. 그것은 지름길 신앙이다. 그것은 순종이 없는 신앙이며, 사람이 하나님 율법에 포함된 것 위에 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양심 없는 기독교를 갖고 있는데, 율법 없는 종교, 행동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믿음, 채찍이 없는 사랑이다. 세상의 대부분이 영적 흑암과 인류를 전적인 재난의 끝으로 인도하고 있는 발전된 이교주의 아래 놓여 있다.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세상은 살기에 불안정한 곳이며 세상의 끝이 눈에 보인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참되고 중요한가를 잊어버려 왔다. 성경은 어둠과 의심의 때에 빛과 확실함을 제공하고 있다. 성경의 위대한 진리에서 떠나는 어떠한 교회도 오늘날 세상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238.2)
 우리는 종종 세상은 신앙의 부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 때 남은 교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의해 구별되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전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어야 한다.(계 12:17, 14:12; 18:1-5 참고) (239.1)
 남은 교회의 신앙은 믿음, 사랑, 그리고 순종의 바른 관계 위에 놓여져 있음을 강조한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헌신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전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인정하며, 모든 것을 다스릴 그리스도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며, 온 존재를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섞이게 한다. 남은 교회는 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는다. (2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