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는 제물을 드리는 이와 여호와, 이 두 당사자들 간에 거래가 성사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제물을 드리는 이가 음식 헌물을 여호와께 드림으로써 받게 되는 혜택은 한없이 위대한 속죄의 선물이었다(레1:4). 속죄를 뜻하는 “atonement”라는 영어 단어는 “at-one-ment”라는 영어 단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두 당사자들을 서로 화해시킴으로써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Atone”(화해시키다)이라는 말에는 히브리 원어의 의미가 정확히 담겨져 있다. (77.2)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의 모든 짐승들의 주인이시며 또 인간의 음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시 50:10~13). 그러므로 짐승제사들은 그분과의 화해 (reconciliation)를 사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여호와의 값없는 속죄의 선물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증표였다(참고 사 55:1). 사실 번제의 제물들이 하나님께 드려졌던 값진 물품들이었다는 면에서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 대한 헌물이었다. 가축들은 백성들에게 값진 것이었고 그래서 희생 제사에는 비용이 들었다. 아라우나가 다윗 왕이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몇 마리의 소를 주었을 때, 다윗은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였다(삼하 24:24). (77.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들의 궁극적인 소유주이셨고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렸을 뿐 그들은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78.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번제물들은 내가 일곱 살 때 나의 부모님께 드렸던 크리스마스 선물과 비슷하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대학원 유학을 위해서 미국으로 막이주했던 때였다. 나의 어머니는 식료품점의 통로를 오가며 당신이 살 수 없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울곤 하셨다. 우리 집은 1센트까지 아껴야할 만큼 가난했다. 크리스마스가 때 내게는 부모님께서 주신 5센트 동전 외에는 부모님께 드릴만한 값나가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 동전을 포장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모님께 드렸다. 나에게는 약간의 비용이 드는 선물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부모님이 내게 주셨던 것을 다시 돌려드린 것뿐이었다. 그 동전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중요했지만 그것으로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샀던 것은 아니다. 나의 선물은 부모님이 이미 주신 사랑을 내가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나의 반응이었다. (78.2)
 속죄에는 죄와 같이 관계를 방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죄하실 때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우리의 죄를 분리시키신다.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in our sins)가 아닌 우리의 죄로부터(from our sins) 구원하시는 것(마 1:21),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었다(마 1:21). (78.3)
 그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받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79.1)
 죄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죄를 없애야만 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지만(요일 4:8) 죄의 속성은 이기심이다. 둘은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알레르기를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에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 관계가 아주 중요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은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해서라도 알레르기부터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개 알레르기가 있는 자신의 가까운 친구를 위해 개 키우는 것을 포기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죄를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개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우리의 죄들을 좋아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죄들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죄인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친구인가? (79.2)
 음식 헌물의 준비
 번제의 체계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동들은 번제의 목적을 이루는 일을 돕는다. 가축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사등분으로 쪼개는 등의 모든 행동들의 역할은 확실하다. 이 행동들은 확실히 음식 헌물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꼭 희생 제사가 아니더라도 짐승의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유사한 행동들이 필요하다. (79.3)
 내장(창자를 포함한)과 정강이(뒷다리)를 씻는 이유는 안이나 위에 묻어있는 배설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참고 레 4:11~12). 배설물은 음식 헌물에는 적합하지 않은 요소이다. (80.1)
 안수=제물 드리는 이의 확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 혹은 기대는 것은 짐승의 주인으로서 그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희생의 대속하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는 레위기 1:4의 강조점이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확인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레위기 1:4은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그의 손을 기댈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그를 위하여 열납되어 를 위한 속죄가 될 것이다”(밀그롬 역, 이탤릭체로 된 것은 저자에 의해 강조 된 것임)· (80.2)
 한 손으로 운반할 수 있는 새나 곡물의 희생 제사는 안수가 요구되지 않았다(레 1:14~15; 2:2, 8; 5:7~13 참고). 그 때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안수는 소나 양과 같은 가축을 드릴 때만 요구되었고 특별한 경우에 이런 제물들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돕는 사람들에 의해 성소의 뜰로 끌려갔다. 예를 들어 노인은 날뛰는 짐승을 다루기 위해서 자신의 손자를 데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에 제사가 그를 위해 드려지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80.3)
 안수를 함으로서 소유권을 확인하는 동안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안수는 오늘날 차량 소유주가 차량을 매매할 때 차량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서명하는 것과 같았다. (80.4)
 희생 제사가 드려질 때에 항상 무언가가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어떤 특정한 희생제사에 안수가 필요했다면 안수는 무언가를 전가하는 일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을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용서를 받을 때 죄가 제거되는 것과 관련하여 깊이 연구하게 될 것이다. (81.1)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의 결심으로 드렸던 사적인 제사들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대력에 따라 특정한 절기 때마다 행해져야 했던 공적인 제사들도 있었다(민 28~29). 이러한 제사들은 하나님께 대한 “약속들”로 누가 드리는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 아마 이런 사실 때문에 절기 제사들은 안수가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다. (81.2)
 피=생명을 위한 속전
 단의 사면에 피를 뿌리는 것은(레 1:5) 연기 형태로 하나님께 드려졌던 “음식헌물”의 고기에서 피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음식 헌물”은 짐승을 잡을 때 그 피를 빼냈던 코셰르(kosher, 전통적인 유대인 의식 식사법으로 제조된 식품—역자주)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호와께서는 피로 상징되는 생명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셨다(레 17:11). 그분께서는 또한 사람들이 짐승을 잡을 때 피를 빼지 않은 고기 먹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모본으로 보여주셨다(창 9:4~6—이스라엘 민족 이전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레 17:10, 12; 신 12:16, 23~25; 행 15:20, 29—모든 이방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81.3)
 성경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고기를 굽거나 절임으로 혈관 속에 남은 모든 피를 제거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사람들에게 짐승을 잡을 때 피를 빼내라고 명령하셨다. (82.1)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이 홀로 피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사용할 권리가 없는 피를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을 몸소 실천하신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모본은 예수님의 침례이다(마 3:13~17). 예수님께서는 침례로 표현된 죄로부터의 씻음이 필요 없었지만 침례를 받으셨다. (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