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8 장 바울과 새언약
 바울은 신명기 30장에 나오는 모세의 말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도다”고 마음으로 믿는 그리스도 중심의 내용으로 제공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의 말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지금 구원받는 복음 진리의 말씀에 적용하고 있다(롬 10:9-10). 크랜필드는 로마서 10:4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려하게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표, 목적, 의도, 참된 의미, 그리고 본질이다. 그분을 떠나서 율법은 결코 바로 이해될 수 없다.”10 (136.1)
 토라의 이러한 예비적 기능이 신명기에 나타나 있다. 거기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을 받은 것은 그들의 “의나 성실”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신 9:46; 30:11-20). 바울은 단호하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갈 2:16)라고 진술한다. 그리고 좀 더 과한 표현으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 3:10)라고 한다. 그는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고 논증한다. (136.2)
 카이저(Walter C Kaiser)는 갈라디아서 3장의 이 구절로부터 “생명과 의를 줄 수 있는 그런 법은 전혀 없었다. 또한 법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의 정반대 입장에 있도록 의도되지도 않았다”11고 결론을 내 렸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신의 신학을 명확하게 요약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136.3)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제시한 신학적 대립은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과 은혜의 대립인가? 그렇지 않으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대립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한다고는 결단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율법으로 인한 의”(의 전통)은 무효화 시켰다. 바울 신학은 두 가지 다른 구원의 길을 서로 상반되는 입장에 두었다. 하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이다. (136.4)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설명하였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의 신학에 대한 바울의 변증이다. (137.1)
 로마인들에게 그는 이것을 좀 더 긍정적인 용어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슈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열성 있고 전투적인 바리새인으로 살기위해 율법을 사용하였던 것(빌 3:6-9; 마 19:16-20과 비교)과 같은 유대인들의 율법 오용이다. 그들은 그것을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가납되는 길로 사용하였다. (137.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기초하여 바울은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면서 얻는 희망, 신자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령을 체험함 등이다(롬 5:1-2, 5). (137.3)
 오직 의롭게 된 신자들을 위하여 바울은 율법의 상담적 기능,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의 현명한 안내 역할을 언급한다.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바울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롬 13:10)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그는 위로의 말을 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137.4)
 혹자들은 사랑이 율법을 대체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갈 5:14)다고 하였다. 바울은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자체적인 법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런 위험한 오류가 신약을 잘 못 읽게 만든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강령이요 완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한다. (137.5)
 예수께서 산상보훈의 토라에 대한 메시아적 해석에서 설명하신 것처럼(마 5:43-48; 제6장을 참조하라) 사랑은 율법의 거룩한 원천이요. 목적이다. 크랜필드는 “바울에게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폐해진 것이 아니었다 ∙∙∙ .그에게 있어서 성령을 주심은 신자의 삶 속에 율법을 세우는 것이었다 ∙∙∙ .성령은 그를 자유롭게 하여 순종에 이르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진심으로 진지하게 지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며, 계속해서 점점 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준다”12고 확신하였다. (138.1)
 화란의 신약학자인 리더보스(Heman Ridderbos)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사랑의 속박하는 성격과 율법의 속박하지 않는 성격 사이에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모든 반대는 바울의 분명한 선언으로 인해 거절된다.”13 프랑스 종교 개혁자 존 칼뱅도 마찬가지로 신자는 하나님의 법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자에게 “율법의 바른 사용”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깨어서 순종하게 되고 ∙∙∙ 죄악의 실족케 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14고 하였다. (138.2)
 로마서 6:14의 바울의 문제의 진술
 로마서 6: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는 바울의 결론적인 진술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종종 유명한 복음주의 문서에서 잘못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139.1)
 도입 단어인 “왜냐하면(for, 역자주, 한글판에는 나타나 있지 않음)”은 바울이 바로 그 앞에서 한 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6:12)라는 구절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권고는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바울의 복음 명령이다. 그것은 그가 로마서 6:1-7에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은 신자들의 변화 시키는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139.2)
 이 장 전체는 늘 도전해 오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란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 바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율법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이슈는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율법의 역할이 아니다. 그 문제는 이미 로마서 3-5장에서 해결되었다(3:28; 5:1 참조). (139.3)
 로마서 6장의 문제는 우리의 성화된 생애에서의 율법의 역할이다.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고 우리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칭의 이후에도 여전히 율법은 진정 유용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죄와 그 오염시키는 권세 때문에 여전히 주인을 정죄하는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가? 바울은 힘주어 말한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헬라어 kyriesei의 문자적 의미는 ‘너희에게 주인이 되지 못하리니’이다]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는 침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모신다. 크랜필드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하였다. (139.4)
이 문장은 죄가 더 이상 그들의 주인이 될 수 없으리라는 약속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주인인 그리스도가 그들을 소유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가 그들을 지배할 힘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7:14]. 그것은 그들이 다시는 죄의 권세 아래서—물론, 그것은 그들이 음탕하게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으로부터 뒤돌아서지 않는다면 도움 없이 버려둠을 당치 않으리라는 뜻이다.15
(140.1)
 바울은 율법의 통치와 은혜의 통치를 대조시키고자 한다. 그는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진술한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기독교 신자에게 도덕적 율법의 권위가 폐해진 것을 의미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문맥에서 이탈시켜 보면,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문학적 문맥 안에서 “율법 아래와 ”은혜 아래에 대한 바울의 대조는 한편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정죄의 권세 아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칭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가 로마서 8:1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거기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140.2)
 바울에게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로마서 5: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의” 안에서의 삶을 살고자 그리스도의 통치와 승리의 권세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은혜 아래 있는 것의 완전한 반대, 즉 우리의 삶 속에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는 교리적 선입견을 방어하려고 하기보다 문맥의 해석학적 안내를 받아 나온 것이다. 로마서 6:14의 문제의 본문은 6장 그 자체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보면 분명해 진다. (140.3)
 던(James J. G. Dunn)은 로마서 6:14에서 “율법 아래”라는 바울의 구절의 좀 더 넓은 차원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 표현은 바울에게 “유대 백성전체의 입장(고전 9:20; 갈 3:23; 4:45, 21) ∙∙∙ 즉 유대주의 안에서 경험하여 온 옛 시대의 삶의 형태”16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율법 아래”라는 구절을 이렇게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진술과 어울린다. 많은 갈리디아인들이 모세의 의식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시험을 받고 있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병행 구절들을 가까이 비교해 보는 것은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