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온 세상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칼과 창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알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그가 너희 모두를 우리의 손에 넘기실 것이다”(46, 47절, 「새국제역」). 세상은 우리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도 같은 것을 알기 위해 기다리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153.3)
 5.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50절). 소수의 백성의 손에 들린 소수의 무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위한 큰 승리를 의미한다. (153.4)
 그렇다! 그 이야기는 또한 폭력으로 넘친다-오늘날의 세상에 폭력이 난무하듯이 너무 많은 폭력이다. 그러나 가끔 주께서는 폭력을 끝내시려고 폭력을 사용하신다. (153.5)
 그가 그를 알았는가, 혹은 몰랐는가?(16:14-18:9)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저자의 넓은 구성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앞의 16장의 이야기와 어떻게 바로 연결시키는가이다. 거기서 다윗은 이미 사울의 악사이며 병기 든 자이며,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정식으로 요구해서 궁정으로 데려온 자이다. 요컨대, 16장에서 사울은 다윗을 잘 알았다. 그런데 17장에서는 그가 다윗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 장 마지막에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 채”로 사울 앞에 서서, 사울이 묻는 말을 듣고 있다: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57, 58절). (153.6)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두 이야기가 두 개의 다른 출처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그 둘 사이의 긴밀한 연결점을 찾으려는 심각한 시도를 포기하였다. 적어도 피상적으로 「70인역」의 중요한 사본인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은 “자료”상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훨씬 짧은 골리앗의 이야기를 보존하며 16장과 마찰되는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이다(17:12-31, 55-58; 18:1-5). (154.1)
 「70인역」에 누락된 그 문단의 내용에 비춰 볼 때, 17:12-1516장17장을 연결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즉 이새와 그의 여덟 아들들, 맏아들부터 세 아들의 이름들, 다윗이 양떼를 돌보았다는 것 등이 언급되어 있다. 만일 저자가 이 두 장을 연결시킬 생각이 없었다면 왜 구태여 그 세세한 연결 고리를 만들었을까? 사무엘상․하의 저자는 작품을 구성할 때에 분명히 “자료들”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는 기술이 있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저자였는가 아니면 얼뜨기 편집자였는가? 혹은 달리 말해서, 그가 책을 저술하였는가, 아니면 스크랩을 했는가? 나는 폴친(Samuel, 161-176)의 견해를 따르는데, 그는 16장17장의 긴장은 다윗과 사울을 묘사함에 있어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기술적으로 설정한 것이라는 해석을 주장하고 있다. (154.2)
 사무엘상의 사건들을 저자가 제시하는 대로 본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때에 사울은 확고한 성취를 이루었고 또한 심한 곤란도 기록했다. 그의 공적인 기름부음은 이 두 가지의 혼합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피선과 왕으로 선포됨 전에 사무엘이 왕권에 반대하는 신랄한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행구 속에 숨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10:17-25). 성경은 암몬 사람 나하스를 대항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록한다(11:1-11). 이것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보복하여 승리한 것이다. 사무엘의 개입이 그날을 건졌고 왕권을 공고하게 하였다(12-15절). 다음은 길갈에서 사울이 버림당한 것이다(13:8-14). 이것은 요나단의 용감성에 의해 승리하고 사울의 성급한 맹세로 망쳐진 믹마스에서 블레셋 사람을 이긴 일 뒤에 나온다(14:1-46). 결국, 아말렉에 대한 승리는, 사울이 마침내 버림을 당하도록 이끌어 간 불순종에 의해 오손(汚損)되었다(15:4-26). (154.3)
 그리고 16장에서 사울은 확신을 얻을 몇 가지 이유가 있었고, 어디로서인지 물론하고 악령(14절)에 의하여 “괴롭힘”을 당할 이유가 더 많았다. 다윗은 왕을 도우려고 거기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떠나버린 왕의 판단은 얼마나 신뢰도가 있었는가? 바로 이것이 골리앗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에 생각 있는 독자가 가지는 의문일 것이다. (155.1)
 14장의 믹마스의 만남과 같이 사울은 손을 비비꼬고 있었다. 거기서 요나단이 승리의 불꽃을 당겼다. 17장에서 다윗이 그 역할을 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왕은 그저 업히려고 따라왔다. 그런 경우에 괴롬당하는 왕이 그의 어린 악사, 병기 잡은 자가 거인과 맞닥뜨려 싸운다고 했을 때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울이 다윗에게 한 말은 다윗의 맏형 엘리압이 한 말과 들어맞는 것이 아닐까? 사울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33절)라고 소리쳤다. (155.2)
 다윗이 사울의 갑주를 거절했을 때에(38, 39절) 사울은 다윗이 그래도 골리앗과 싸우려는 의도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윗이 실지로 거인을 맞으러 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브넬에게 던진 그의 질문은 의아함과 빈정댐이 들어 있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55절). (155.3)
 아브넬은 대답 아닌 대답을 하였다: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155.4)
 그러나 왕은 급했다: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 보라”(56절). (155.5)
 저자가 17장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지시대명사로 지칭하는 것은 얕잡아보는 투라고 폴친은 이해한다. 그의 목록 속에는 골리앗을 “이 ... 사람”(25절), “이 블레셋 사람”(26, 32, 33, 37절), 그리고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26, 36절)이라고 표현한 것 같은 예가 들어 있다. 아브넬에게 던진 사울의 두 질문(55, 56절)에는 유사한 빈정댐이 들어 있다: “이 소년,” 그리고 “이 청년.” (155.6)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울은 기분 나쁠 일이 있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패주하였는데, 사울의 공로가 아니라 다윗의 공로로 그렇게 된 것이다. 사울이 다윗의 경솔한 용기 때문에 속을 끌이고 있었다면 다윗의 부계에 대한 언급은 후에 요나단의 모계에 대한 비난 속에 나타난 그 같은 조롱으로 채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너 패역부도(悖逆不道)한 계집의 소생아!” (20:30). (156.1)
 아브넬이 다윗을 왕 앞에 데려 왔을 때에,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 채”(17:57) 서 있었고, 사울의 질문은 퉁명스럽고 날카로웠다: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156.2)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다윗의 직선적인 대답은 순진하게 들릴지 모르나 가시 돋힌 도전적 태도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폴친이 지적한 대로, 다윗이 사용한 종이라는 말은 골리앗이 모멸적으로 사용한 사울의 신복(8절), 종(9절)의 반향일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일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왕의 “종”[「새국제역」: “노예”]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떠올린다(8:17). (156.3)
 계속되는 이야기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질문에 위압적인 위협이 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전에는 다윗이 그의 시간을 사울의 궁정에서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양떼와 함께 보냈다(16:19-21). 지금은 다윗의 군사적 위용이 드러난 마당에 사울은 다윗에게 그의 출생적 부계를 버리고 사울의 아들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사울은 아들이라는 명칭을 다윗에게 실지로 적용한다(24:16). 여기서, 다윗의 저항은 사울의 단호하고 위압적인 행동을 초래하였다: “그날부터 사울이 다윗을 그의 곁에 두고 그의 아비의 집으로 가지 못하게 하니라”(18:2). (156.4)
 요컨대, 사울이 이전 전투에서 블레셋을 패퇴시킨 지도자 요나단에게 위협으로 반응하였듯이(14:39, 44), 지금 블레셋에 대한 또 다른 승리의 지도자인 다윗을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이 시점에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18:1)고 말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폴친의 표현으로, “요나단은 그 자신이 사울과 마찰이 있기 때문에 다윗의 단순하나 도전적인 대답에 마음이 끌렸다. 백성들이 14장에서 그의 생명을 구했던 것처럼,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에서 그는 다윗의 생명을 구한다”(Polzin, Samuel, 176). (157.1)
 요나단의 헌신은 결코 멀리서 바라보는 느슨한 동경이 아니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다윗과 “언약”을 맺었고 그는 그의 옷과 웃옷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다(18:4). 장차 왕이 될 젊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 상징은 대단하였다. 그가 매우 의미 있는 세 벌의 무장과 무기에 손을 대게 되었다: 사울의 병기(17:38, 39), 골리앗의 병기(54절), 요나단의 병기(18:4). 여인들의 노래가 사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한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절). (1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