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괴로움은 분명히 죄의식과 우울증에 의한 과중된 정신병의 결과라고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이 악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 사실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이 악신을 병으로 취급하고 적어도 일시적 치유를 위하여 위로의 음악으로 실제적인 치료를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16, 23절). 물론 숙달된 음악가가 요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다윗이 왕가에 오게 된 경위였다. (148.1)
 사울의 신하들이 왕의 문제를 진단하고 가능한 치료책을 제안하였을 때에 사울은 동의하였고, 사람을 추천하도록 요구하였다. 다윗을 제안한 종은 그가 음악가일 뿐만 아니라,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18절)라고 소개하였다. (148.2)
 사울은 지체하지 않고 이새에게 공식적인 요구를 하여 그의 아들 다윗이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사울은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았다(21절). 이 장은 다윗의 음악의 힘에 대한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23절). (148.3)
 다윗의 정직성이 현대의 독자에게 문젯거리가 될 수 있다. 사울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알면서 어떻게 양심적으로 사울 왕을 섬길 수 있었는가? 성경은 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윗은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하고자 했는가? 물론 그 후의 이야기를 보면 그는 사울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던 두 경우가 있었다(24:3-7; 26:7-25).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기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149.1)
 다윗의 정직성과 관련하여 현재 사무엘상에 배열된 사건들의 연대적 순서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16장의 사건들을 그의 이야기의 이 시점에 놓은 두 가지 이유는 분명하다: 기름부음은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증명서이다; 그리고 그가 사울의 집에 들어간 이야기는 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다윗이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논리는 정확한 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149.2)
 그러나 연대를 재구성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두 사건이 곤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기름부음과 관계하여 사무엘의 저항과 바른 “후보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과, 사울을 거절한 두 개의(앞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후계자를 선택하셨다는 확고한 진술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13:14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선포한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15:28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시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사무엘의 그런 “지식”과 기름 부을 때의 “무지”를 어떻게 서로 연관시킬 수 있을까? (149.3)
 다윗이 사울의 집에 들어간 것과 관련하여 비슷한 질문이 떠오른다. 사무엘상의 사건들이 연대순으로 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계승자에 대한 선언이 가득 찬 두 개의 거절 이야기는 이미 사울을 영영 의심스럽게 하고 편집적(偏執的)으로 만들었다. 아래 제안된 더 교묘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사무엘상을 바로 읽으면, 사울의 질투, 의심, 미움 등은 18:18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6절) 후에, 여인들이 자극적인 노래로 개선하는 군인들을 맞이하였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 그것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일으켰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8, 9절). (149.4)
 흥미롭게도 이 사건 직전에 나오는 저자의 논평은 그가 정확한 연대를 보존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큰 증거가 된다. 만일 여인들의 노래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6절) 후에 승리한 군대에 대한 환영이라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한(2절) 시점(“그날 이후로”)을 표시한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여인들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 전에, 저자는 사울이 다윗을 대개 신뢰한다는 요약 진술을 기록한다. 그 진술은 사울이 다윗을 오랜 기간 깊이 신뢰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5절). 이런 진술이 뜻하는 대로 장기간의 신뢰 관계를 놓고 볼 때, 골리앗을 이긴 후에 군대가 돌아왔을 때부터 사울이 어떻게 “다윗을 주목하”였을까?(9절)[“다윗을 질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까?”—「새국제역」]. (150.1)
 그 종이 다윗을 사울의 집에 데려왔을 때에 한 말은 연대순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미 그때에(비록 사울에게는 아직 분명히 전달되지 않았지만) 다윗은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16:18)로 알려져 있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기 전에, 사울이 다윗을 자기의 병기 든 자 중 한 사람으로 정했지만(21절), 사울은 다윗을 “소년”(17:33)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다윗의 무사 실력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윗이 그 거인을 죽인 후에 사울이나 아브넬도 다윗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55절). 16:19에서 다윗의 봉사를 허락하라고 요구했던 그 사울이 이제 다윗에게 질문을 던진다: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58절). (150.2)
 대체로 학자들은 겉보기에 불가능한 연대적 순서를 저자의 자료 이용 방법, 어설픈 편집(編輯) 때문으로 돌린다. 그러나 폴친(Samuel, 161-176)과 비슷한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설픈 편집 대신에 다윗의 등극과 사울의 몰락에 대한 기술적 묘사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 둘 사이에 증폭되는 긴장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영감 받은 기교는 저자가 정확한 연대를 만들어내려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목표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기름을 받고 그분의 신에 충만한 사람도 엄청나게 잘못 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엘리, 사무엘, 사울—그리고 바로 다윗도—아니 특별히 다윗, 이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실패의 부분을 이루고 있다. 재능, 지혜, 인물, 부, 심지어 하나님의 신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간 사람의 실패를 막을 수 없다. 다윗의 드러난 매력에 관하여, “좋은 용모와 우람한 체격”(Klein, 166)은 왕권의 야망을 가진 다른 두 사람, 즉 사울(9:2)과 압살롬(삼하 14:25, 26)과도 관계가 있는데, 그들은 시기나 감탄을 자아낼 그런 유(類)의 인간은 아니다. (150.3)
 사무엘상∙하가 실패한 기업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무엘상 16장의 다윗에 대한 소개는 더 놀랍다. 재능이 있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고, 호감을 사며 감탄을 자아내는 사람, 사울의 종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더이다”(18절)라고 소개한 사람이 여기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찌 실패할 수 있는가? (151.1)
 사무엘상의 저자는 참으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의 실패에 대한 기념비적 성질을 좀더 잘 이해하도록 저자는 다윗이 어떻게 인기, 권력, 지위를 얻었는지를 먼저 말한다. 만일 인간적 관점에서 여호와께서 사울의 죄 때문에 그를 심판하고 거절하는 데는 매우 신속하셨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유사하게도 우리는 다윗의 죄를 인하여 그를 벌하시는 데는 매우 느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의 시작과 상관없이 결국 신자는 엘리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3:18). (151.2)
 마지막으로,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는 심사숙고할 질문을 드리운다: 연약한 인간에게 닥치는 악에 비추어 볼 때 믿음의 길은 때때로 어렵지 않은가? 단도직입적인 대답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신의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여호와의 열정과 고통을 쳐다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사울 왕에 대한 슬픔(15:35), 기쁜 피리 소리나 애가를 들어도 반응이 없는 백성을 위한 고뇌(마 11:16, 17), 그의 백성의 도성을 향하여 염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분의 슬픈 눈망울. 그는 외쳤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151.3)
 거인—신자들을 위한 이야기(17:1-54)
 폭력과 혈투에도 불구하고(아마도 그것 때문에!)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이야기는 늘 사랑받는 성경 이야기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이야기는 가망 없는 패배자가 올라서는 놀라운 경우로서, 마치 용감한 꼬마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동네 깡패를 무찌르는 것과 같다. (152.1)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이다. 이것은 자기와 동맹을 맺은 백성들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산 증거이다. 용기 있는 목동의 손에 들려 있는 물매와 돌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험하고 적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구원하셨다. 이 이야기가 신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도록 만든 요소들은 사무엘상․하의 넓은 무대 위에서의 역할을 우리가 탐구하기 전에 한번 맛을 봐도 좋을 듯하다. (152.2)
 필자는 그 이야기를 읽어내려 가면서, 폭력에 눈이 끌리지 않으려고 결심하였고, 다섯 가지가 특별하게 와 닿았다. 잠깐 동안 신자로서 그것들을 한번 살펴보자. (152.3)
 1.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할례받지 못한 이 블레셋 사람은 누구인가?”(26절). 원수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기가 떨어지고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원하였다. 불확실성의 가면 뒤에는 어떤 믿는 사람에 의하여 전기 충격과 같은 힘을 얻기를 바라는 기대가 숨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방어하기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도대체 이 블레셋 사람은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152.4)
 2.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37절). 작은 승리들은 미래의 큰 승리의 약속이다. 거인들을 데려오라! (153.1)
 3.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절). 우리 손에 있는 무기가 아니라 어떤 깃발 아래 우리가 행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1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