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을 버린 이유가 드러나자 타락한 군주에 대한 계속적인 사무엘의 애정은 선지자 자신에게도 누가 되었다. 참으로, 다윗에게 기름 붓는 이야기는 사무엘을 이 사명에 대하여 기꺼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별력도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여호와께서 단도직입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사무엘은 아마도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았을 때에 “실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여호와 앞에 서 있도다”라고 외쳤다(6절). 그러나 주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여러 다른 아들들의 처지에 관하여 드러나게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네 아들들이 다 있느냐?”(11절)라는 사무엘의 마지막 질문은 선지자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호와께서 여전히 사무엘을 그의 사자와 대변인으로 사용하고 계셨지만 사무엘의 대화 중 마지막 것으로 기록된 이 말 속에 비친 그의 부족한 통찰력은 3장에서 사무엘이 성전에서 여호와의 음성을 알아차리기 위하여 여러 번 시도하였고 그것도 엘리의 도움을 힘입어 겨우 알게 된 그 처음으로 기록된 대화 속에 나타난 흡사한 더딤을 상기시킨다. (142.3)
 이 두 대화 사이에는 사무엘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별 수 없는 인간 도구라는 다른 표시들이 있다. 법궤가 없어졌을 때에 사무엘은 그 일에 개입할 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석 장(4-6장)에 걸쳐서, 그리고 약 20년 동안(7:2) 등장하지 않고 있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였을 때에 사무엘은 백성들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세 번이나 저항하였다(8:7, 9, 22).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과의 약속 시간에 늦었고, 그래서 새 왕이 불법적으로 제사를 드리도록 시험하였고(13:8), 그 결과 그의 왕국을 상실하게 했으며, 그 심판을 사무엘 자신이 선언하였다. 선지자 사무엘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를 통하여 계속 일하셨다. 실로, 골리앗을 이긴 승리가 보여주듯이, 버림당한 사울이 왕위를 잡고 있는데도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아직도 축복하실 수 있다(17장). 이 책의 영웅들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독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다윗 속에 어떤 결점이 나타나는지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13:14). 저자의 시대에 다윗 왕조의 몰락은 물론 기정 사실이었는데, 왜냐하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을 때에 왕조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윗이 권력에 오르는 이야기는 그 이유에 관하여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가? (143.1)
 사무엘은 사울의 후계자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뒤로 발을 빼었다. 그는 “내가 어떻게 가리이까?” 하고 여호와께 여쭈었다. “사울이 이를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16:2). 그의 걱정은 이해할 만하였다. 왜냐하면 라마로부터 베들레헴까지 가려면 사울의 기브아를 통과하여야 하였다(Hertzberg, 137).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이 딴청을 부려 자신을 보호하도록 제안하셨다: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라(16:2)고 하셨다. (144.1)
 자기 방어를 위하여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구약에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의 수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비록 십계명에 거짓 증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그 계명의 원초적인 적용은 법정의 재판 과정을 위한 것이다. 「새국제역」의 출애굽기의 명령 번역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너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대지 말라”(20:16). 이 법정에 관한 내용임이 신명기 19:16-21에 더 잘 설명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거짓 증거를 댄 사람을 “그가 그 형제에게 의도한 대로” 갚아주도록 권력자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19절). (144.2)
 그러나 진실을 더 교묘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다른 상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여기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이 예측할 수 없는 사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은 피에 굶주린 바로 왕에게 기발한 대답을 한 산파들의 말(1:16-21)과, 반역자 압살롬에게 “지혜로우나” 빗나가게 하는 조언을 한 후새의 말(삼하 15:32-37; 16:15-17:23)과 유사하다. 더 심한 것은 라합의 이야기인데, 그것은 간첩 활동이 관련되었을 때에 진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수 2). 더 심한 경우는, 동시에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게하시에게 온전히 다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킨 수넴 여인의 경우가 있다. 그녀는 선지자의 종에게 자신의 가슴 쓰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왕하 4:24-26). (144.3)
 어쨌든 사무엘은 상처 없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그 마을의 장로들은 그를 보자 떨었다(삼상 16:4). 아마도 선지자가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144.4)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면서 사무엘은 장로들에게 자신을 성결케 하라고 말했다. 그 자신은 이새와 그 아들들을 구별하여 그 제사에 참석하도록 특별 초청을 했다(5절). (145.1)
 사무엘의 첫 검사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일곱 명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자로부터 세 명만이 언급되었다: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사울의 적당한 후계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장자 엘리압에 대한 사무엘의 열정을 여호와께서 식히셨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에 단지 잘 생겼다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셨다. 그는 사무엘에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다(7절). (145.2)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은 결국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다윗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12절). 그의 불리한 점은 그가 매우 어리다는 것과 그의 아버지 집에서 연장자가 아니라 막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안 된다. 기름 부은 후에 성경은 “그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13절)고 기록한다. (145.3)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라는 짧은 언급 뒤에 사울의 형편에 대한 저자의 혼란스런 평가가 뒤따른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14절). 사무엘의 퇴진과 함께 무대에는 기름부음 받고 신으로 충만케 된 두 사람만 남았다. 다윗은 사울이 일전에 경험한 대로 여호와의 신으로 채움을 받았다. 대조적으로 사울도 역시 “여호와께로부터” 왔지만 전혀 다른 신에 의하여 괴롭힘을 받고 있다. (145.4)
 보충 설명: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신
 구약에서 악을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이 또한 사단을 하나님의 구속을 받는 존재로 나타내는 것을 알 때에 이해하기 쉽다. 인간사를 장악하려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투쟁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여호와께서 선과 악에 책임이 있으며, 사단은 거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구약의 세계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실로 형편이 그러하다. 구약 전체에서 세 곳에서만 초인간적인 “사단”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역대상 21:1; 욥기 1, 2장; 스가랴 3:1-이 세 경우는 구약 시기의 끝 무렵에 기록되거나 정경으로 간주된 책들에 나타나는 기록이다. (145.5)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에 적용시키는 다른 구절들, 즉 창세기 3장(뱀), 레위기 16장(아사셀을 위한 염소), 이사야 14장(루시벨), 에스겔 28장(덮는 그룹)은 뚜렷한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이며 신약의 빛에 의해서만 사단에게 적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2:7-9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자료 중에서 뱀을 사단이라고 드러내놓고 정의하는 첫 구절이다. (146.1)
 사단을 언급하는 구약 구절들 중에서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을 주는 책들은 욥기와 역대상이다. 욥기에서 사단은 서론의 두 장면에서 나타나는데(1:6-12; 2:2-7), 그는 온전히 여호와의 주장 아래 있다. 저자와 독자는 사단에 관하여 알지만 욥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 책 전체에 걸쳐서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욥의 분노의 대상이다(예컨대, 9:13-22; 16:7-17; 19:5-22을 보라). 마지막에 욥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지만(42:1-6), 사무엘상 16장에 나온 것과 흡사하게도 욥은 사단의 실상을 결코 알지 못한다. (146.2)
 역대상 21:1의 사단에 대한 언급은 다른 방향으로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나오는 평행 구절인 사무엘하 24:1이 여호와의 하신 일—즉 다윗의 인구 조사를 부추긴 일—이라고 하는 그것을 히브리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에서는 사단의 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기사는 같은 사건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성경적 관점을 증거한다. 전자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일의 책임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사단의 역할로 인식되었다. (146.3)
 다수의 학자들이 “후기의” 사단에 대한 언급을 외국(페르시아)의 영향으로 돌리는 반면, 세상에 실지로 마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신자들은, 예전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목자적 돌봄의 일환으로 선과 악의 직접적인 책임을 자진해서 담당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신교적 문화 속에서 매우 파괴적인 악귀들은 주문과 마술을 통하여 얼르고 달래야 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방법이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조작에 놀아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실 수도 있었고(출 7:3), 광야에서 독사를 풀어놓을 수도 있었고(민 21:6), 악신을 보내어 사울을 괴롭히기도 하셨다(삼상 16:14). 이 모든 것을 그분의 계획의 일환으로 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최고의 여호와이셨으며 모든 상황의 주인이셨다. 확실히 그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인간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셨다. 그러나 구약은 그분을 선악간의 모든 일의 궁극적 책임이 있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146.4)
 예를 들어 존 밀턴(John Milton)과 C. S. 루이스(C. S. Lewis)의 저서들의 일부에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는 엘렌 G. 화잇의 저서에 나타난 악의 문제에 관한 고전적인 “자유 의지적” 이해 속에 욥기는 더 폭넓은 드라마의 축소판이다. 더 넓은 시야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세계에 사단이 접근하도록 허락하시고, 선한 것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셔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선 자체를 위하여 선하다는 것을 보이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옹호하는 것이다. (147.1)
 신약을 통하여 보면, 비록 구약에서 우리가 아는 “사단”이 실제로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타락부터(창 3) 아브라함을 부름(창 12)까지의 인류 역사는 사단의 권세가 거의 완전히 세상을 장악한 기간이라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알아 볼 수 있다. 창세기 3:1“뱀이 여호와 하나님의 만드신 모든 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고 진술하는데, 그 대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 때까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묘한 것으로 남게 된다. (147.2)
 우주에서의 사단의 역할을 아는 것은 현대의 신자들에게 선악의 큰 투쟁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죄의 영향이 얼마 동안 사단의 진면모를 가리웠지만 구약 시대의 끝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원수의 진면모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의 초기 관점이 경험적 유익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유익이 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악이 공격할 때에 우리의 큰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니 우리는 욥과 같이 도움과 치료를 위하여 구속자에게로 향할 수 있다. (147.3)
 사울의 질병, 다윗의 기회 (16: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