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I 부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심 (출애굽기 3-18장) 제 6장 하나님께서 바로의 군대를 정복하심( 출애굽기 13:17-15:21)
 네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언약 위에 세워진 두 번째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신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무기를 가지고 나왔지만(13:18), 그들은 무기를 그 순간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전쟁터의 용사로 또 지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싸울 것이므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14:25; 15:3). 애굽의 병거들과 마주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말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겠는가! (156.3)
 마지막 요소는 다시 명령형이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지 말 것과 담대히 서 있을 것을 명령받았다, 즉 그들은 전혀 동요치 말아야 했다. 이 명령은 움직이지 말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 행해야 했다. 그 명령은 정숙할 것에 대한 요구였다. 아우성, 불평, 저주, 비탄, 울부짖음과 같은 곡성들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전투에 임하거나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무기나 말씀이 필요치 않았다. 정적 속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시편 46:10은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을 조용히 지켜 볼 것을 요구하는 성경절이다. (156.4)
 모세가 명한 이 단순한 다섯 마디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 말씀의 진수이다. “노예”와 같은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또 그분의 언약을 믿는 우리들도 죄 된 습관, 잘못된 관계, 부채 등과 같은 불가능해 보이는 죄 된 “종살이”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 칠 때 이와 같은 승리의 경험을 오늘 맛보게 될 것이다. (157.1)
 하나님의 사자
 출애굽기 14:19은 애굽의 군대가 접근해 오자,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진영 앞에서 뒤로 이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성경절의(14:9b)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라엘 진영 뒤에서 애굽의 군대와 이스라엘 진영 사이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코자 이스라엘 진영 뒤로 이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는 동일한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157.2)
 단어 연구란의 용어색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 단어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매우 보편적인 용어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여러 곳에서, 특별히 사사기에서 보편적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의 의미와 이 단어가 지닌 중요성은 무엇인가? (157.3)
 “사자”라고 번역되어진 히브리어는 본래 “기별자 또는 수행자”를 의미한다(Durham의 Exodus, 163 참조). 이 단어는 또한 인간적 기별자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단어가 쓰여진 정확한 문맥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157.4)
 사려 깊은 독자는 단어 연구란의 여러 구절들이 “주의 사자”라고 언급되어져 있는 반면에 출애굽기 14:19은 실지로 “하나님”의 사자로 언급되어 있음을 인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둘의 의미가 서로 상이하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주 여호와(Lord)와 하나님(God)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본인은 하나님의 사자와 주의 사자는 같은 동의어라고 간주하고 싶다. (158.1)
 자주 하나님께서 당신이 직접 하실 일들을 왜 당신의 사자로 명하셨는지를 정확히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실지로, 몇몇 성경절에서 주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일례로, 창 16:7ff; 21:17ff의 하갈의 이야기, 창 22:11ff의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 출 3:1, 2, 13, 14의 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주의 천사와 여호와 하나님은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이 천사들은 출애굽기 14장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것과 같이 멸망과 심판 보호하심과 구원의 자리에 특별히 임하셨다. (158.2)
 이따금씩 이 천사들은 하나님 자신인 까닭에, 또 그분의 권능과 그분의 자비로운 역사 때문에, 구약에 나타난 그분의 언급을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동일시 해왔다. 몇몇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사실일 수 있으며,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해석을 고집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158.3)
 하나님께서 바로를 파멸시키심
 하나님께서 바로를 치심으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되는 실질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흔히 이와 같은 경우에, 기사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역사하실지에 대한 개요의 형태로 시작되며(14:15-18), 그분께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들이 뒤따른다(14:19-31). 이러한 두 개의 단편이 비교되어질 때는 언제든지 어느 한쪽이 별개의 개념으로 간주되기보다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도록 해준다. (158.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들과 구름기둥을 이용하여 애굽인들에게는 흑암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빛을 밝히심으로 그날 밤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못하도록 하셨다. (158.5)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바다 위로 펴자, 하나님께서 동풍을 보내어 바닷물이 갈라졌으며 사람이 지날 수 있는 마른 땅이 되었다. 기사의 많은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천연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사용하셨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159.1)
 이스라엘 백성은 바람이 만들어 놓은 마른 땅을 통하여 바다 가운데로 걸어갔다. 물은 좌우에 벽이 되어 있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인들을 혼란케 하셨으며 그들의 병거들을 주저앉게 하셨다. 애굽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서 싸우고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들이 도망하기 전에 모세는 권능의 지팡이를 다시 들게 된다. 갈라졌던 물이 다시 흘러 애굽 군대를 덮친다. 이스라엘을 추격해 물 가운데로 들어갔던 애굽인들은 모두 몰살을 당하였다. (159.2)
 하나님께서는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하여 어떤 논리를 주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하여 영광을 얻을 것이며(14:17, 18), 애굽인들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똑같은 논리가 14:4에 나타난다. (159.3)
 우리는 자연적으로 이러한 논리가 이스라엘의 구원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출애굽 이야기의 서두에 언급되어진 것이 이곳서 거의 확실하게 추측되어진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분의 신실하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갈망들이 출애굽 이야기 전체의 기본적 논리들이지만, 그분의 의도는 더욱 넓고 포괄적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애굽과 관련이 있지만 한 국가를 초월한 전 인류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159.4)
 명예는 대중적이고 공개될 수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애굽 군대를 공개적으로 파멸시킨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이다. 이러한 사실로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한 이름이 그분에게 부여됐다. 이 사실은 왜 구원이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세상에 공포하셨다. (159.5)
 이 사건의 결과가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가 14:30-31에 잘 나타나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분명히 보았으며, 그때 그들은 구원을 경험했고 바닷가에 죽어있는 애굽의 시신들을 보았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겼으며 그분을 “경외”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원망과 질책은 경외와 신뢰로 변하게 되었다. 이 백성들이 이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160.1)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