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제 3 편 뜰 제12장 물두멍과 그 받침
 입혀 주는 의(義)는 우리가 행한 어떤 선한 일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롬 3:20)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인 자유로운 선물이요, 은혜의 선물이며 거룩한 은총이다(롬 5:15).2) “그런즉 자랑할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딛 3:5)다. 웹스터에 의하면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애로 들어가는 재창조이며, 부흥이며, 개혁이다.’ (92.4)
 새로운 영적 생애로 들어가는 이 행위가 두 번째 탄생, 즉 중생(重生 · 거듭남)인 것이다. 거울처럼 그분의 의를 반영하는 이 새로운 생애는 그분의 봉사에 온전히 헌신하는 생애이다.

 (92.5)
 이러한 생애를 영위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며, 주의 깊게 모든 요구에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 참된 중생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의 또 하나의 이정표로 특징지어진다. (93.1)
 하나님의 자녀들
 침례가 죄를 씻는 것인데, 씻을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왜 침례를 받으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본으로 침례를 받으셨다. 그분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비둘기(평화의 상징)가 내려왔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마 3:15~17)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에, 큰 평화가 우리영혼을 채우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품성)으로”(마 28:19) 침례를 받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요일 3:2, 신킹제임스역)이기 때문이다. (93.2)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 또는 권속으로 입양되는 필수 조건이며, 침례는 입양 예식이다.3) 그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님이 되신다.4)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일 3:2; 요 1:12, 13)와 “신의 소생”(행 17:29)이 되며, 아버지께서는 무한하고 절대적 진리이신 당신의 독생자를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신다(요 17:23). 우리는 왕의 자녀가 되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하늘 가족의 명부인 생명책에 친수로 기록하신다(출 32:32). 우리의 할 일은 왕족의 혈통에 알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93.3)
 “얼마나 큰 사랑이며, 얼마나 무한한 사랑인가!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는 사랑스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의 표시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부드러운 관심과 관계의 보증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은혜의 후사들을 바라보시면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히 2:11)신다”(교회증언 5권, 739, 740). (93.4)
 물두멍과 발 씻음
 모세의 율법에서 물두멍에서 씻는 것은, 기독교 교회법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침례 예식뿐 아니라 세족 예식과 일치되는 것이다(요 13:12-17).5) (93.5)
 이 기독교의 예식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
 여호와를 위한 봉사에 들어가기 전에 제사장이 씻는 일에 실패할 경우는 죽음을 의미하였듯이(출 30:21, 20),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 그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없”(요 13:8)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거절한 봉사는 더 높은 정결의 표상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씻으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발을 씻기시도록 허락하지 않으므로, 베드로는 그 낮은 정결 가운데 포함된 더 높은 정결을 거절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646). 제사장의 씻는 일의 실패는 베드로의 거절과 같이, 주(主)를 실제로 거절하는 것이었으며, 두 경우 처벌은 같은 것이다. 갈바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희생을 돌이켜 보고, 번제단과 물두멍이 표상하는 신성한 예식에 겸비와 경외의 마음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94.1)
 이 기독교의 세족 예식은 계속적인 정결을 제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씻는 것이든지 침례이든지)자는 ∙∙∙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고 말씀하셨다. 더러움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오염시킬 때, 우리는 이 거룩한 예식에 다시 참여하여, 우리의 침례 서약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한 번 더 입혀지고,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94.2)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요, 물과 피로 오셨”(요일 5:6, 신킹제임스역)다. 피는 희생의 번제단을 말하고, 물은 정결의 물두멍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요한은 군인 중 한 사람이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를 때,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고 주장한다. (94.3)
“그분의 찢어진 옆구리로부터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죄로부터 이중의 치료를 하시고
나를 그 죄와 능력에서 구하셨다.”
(94.4)
 기독교의 세족 예식은 계속적인 정결을 제공한다. 더러움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오염시킬 때, 우리는 이 거룩한 예식에서 물두멍으로 되풀이하여 나아가 우리의 침례 서약을 새롭게 하고, 더 나은 효과적인 봉사를 위해 나아간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고 말씀하셨다. (94.5)
 지상 성소의 뜰에서 모든 씻음과 정결이 희생제물을 죽이고 그 피를 성소에 갖고 들어가기 전에 행하여지듯이, 우리의 모든 정결도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침례와 세족 예식을 상징하는 정결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곳에서 정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화를 위한 성소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95.1)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신 희생제물의 번제단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하신 산 물두멍이 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바로 그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정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 번제단과 정결을 위한 물두멍과 함께 ∙∙∙ 둘 모두의 원형이 되신다”(R. S. Owen, in R&H, 3. 26. 1925.). (95.2)
 칭의가 화목을 따른다
 자복을 수반한 회개와 침례는 죄의 면제의 전제 조건이 된다(행 2:38). 전자는 화목을, 후자는 칭의에 우선한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번제단을 예시함), ∙∙∙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물두멍을 예시함)”(롬 5:10). 물두멍은 번제단의 보완으로, 번제단에서 시작된 사업인 화목은 물두멍이 상징하는 칭의로 완성되어진다. (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