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가들과 저술가들은 분명히 잘못 위치된 이 향단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향단이 성소에 있었을지라도, 그것의 일은 지성소와 밀접히 연결되었다고 바르게 지적하였다. 두 칸을 분리시키는 휘장은 성소의 지붕에까지 이르지 않았으므로, 제사장들이 향을 금향단 위에 드렸을 때, 향기로운 중보의 구름이 지성소를 넘어가서 채웠다. 이 보호막에 의해서만이 대제사장들이 매년 이스라엘의 가장 엄숙한 축제일—대속죄일—동안에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레 6:12-13). 더 나아가, 이 절정의 날에 대제사장은 속죄의 피를 “주 앞에 있는 단”이라 일컫는 금향단의 뿔에—그리고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새국제역」: 속죄 덮개[atonement cover])에—발랐다(14, 15절). (178.5)
 이러한 관찰들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바울이 금향단을 지성소에 위치한 것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히브리서 9:1-5에 있는 성소에 대한 그의 기술(記述)은 단지 두 칸과 그 기구들의 목록에 불과하다. 그는 여기서나 나중에서의 설교에서 금향단이나 다른 항목의 기능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위기 16장의 금향단의 기능에서 추리하려는 모든 시도는 표적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179.1)
 히브리서 9:4의 명백한 “실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만족할 만한 설명이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사도가 여기서 착오(slip)—히브리서의 어떤 논증에도 아무런 차이나 영향을 주지 않는 하나의 착오—를 일으켰다고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매 단어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상들의 완벽하지 못한 전승(傳承)과 더불어 말씀(Word)의 인간적인 면이 분명히 있는 다른 곳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79.2)
 소위 성경에 있는 실수들에 대한 엘렌 화잇의 언급은 도움이 되는 시각을 제공한다. (179.3)
성경 가운데서 항상 완전한 질서나 뚜렷한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적들이 어떤 정밀한 차례를 따라 행하여진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신령한 계시가 요구되는 환경과 처지를 따라서 이적들을 행하신 것이었다. 성경의 진리들은 감추인 보석과 같은 것이다. 진리는 샅샅이 살펴보아야 하며 참담한 노력으로 캐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하여 피상적인 견해만을 가진 자들은, 저희 생각에는 깊은 지식을 가진 듯하나 실제로는 얕은 지식을 가진 자들로서 성경에 반대되는 점들을 말하며,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다. 그러나 진리와 의무에 일치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거룩한 감명을 받을 수 있는 마음 준비를 갖추고 성경을 연구할 것이다. 빛을 받은 영혼은 영적 통일성을 발견할 것이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굵은 황금 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배로운 황금 실을 찾아 나가는 데는 인내와 사색과 기도가 요구된다. 성경에 관한 날카로운 논쟁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탐구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진리의 귀중한 보석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며, 많은 성도들의 기도가 상달되므로,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었다. . . .
(179.4)
성경은 어떤 장엄한 초인간적인 언어로 꾸며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처하여 있는 그 위치에 이르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야만 하였다.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같은 말로써 뜻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 각기 뚜렷한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한 마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엘렌 G. 화잇, 가려뽑은 기별, 1:20).
(179.5)
 히브리서 9:3-4“실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가 모세의 성소와 그 예식들에 관한 그의 묘사에서 그가 강조하려고 하는 점이다. 그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부적합성—한정된 접근과 한정된 정결—을 지적하고 있다. (180.1)
 제사장들이 그들의 정규 봉사를 수행할 때 성소에 들어갔다고 사도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것도 1년에 한 차례—대속죄일에—할 수 있었다(6, 7절). 그러므로 오직 한 사람만이, 그것도 1년에 한 차례, 하나님의 임재 바로 앞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반인은 성소의 바깥 칸에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180.2)
 게다가, 성소의 다양한 희생 제물들과 예식들은 예식적(禮式的) 정결만 제공하였다. 그것들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었다고 바울은 말한다(9절).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위한 결정적 제물을 드릴 때를 가리키는 하나의 예증(例證)이었다. (181.1)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 대한 토론이 히브리서 9:11-10:18에서 전개될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점들—접근과 정결—이 사도의 사상에 두드러지게 특징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9:1-10은 이어지는 논증을 위한 기초를 놓는다. 그리고 이 책의 허두에서 우리가 본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관계를 다시 진술하는 것은 중요하다. 옛 것은 나쁘지 않았고 새 것은 좋았다. 다시 말해서, 옛 것이 좋았으나 새 것은 더 좋다. 왜냐하면 새 것은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옛 것의 명성을 떨어뜨리거나 새 것을 옛 것 속에 붕괴시킬 것이다—어느 경우든 히브리서의 논증의 핵심을 놓쳐 버린다. (181.2)
 하나의 난제(難題)
 히브리서 9:8, 9에서 우리는 성경의 “난제들” 중의 하나에 직면한다. 우리가 이 절들에 대하여 시간을 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뜨려 열려는 시도는 핵심 장들인 9장10장을 통하여 해석상의 문제들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181.3)
 다행히도, 사도의 전반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9:1-7에서 모세의 성소와 의식들에 대하여 대략 말한 다음, 그는 성령께서 이 모든 것으로써 보이신 것은 더 좋은 길이 아직 와야 했으며, 옛 것은 그것의 예증이었다고 말한다(9절“예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라볼레[parabolē, 비유]). 그러므로 그는 옛 제도 하에서의 한정된 접근을 새 날의 도래에 대한 암시로써 강조하고 있다. (181.4)
 그러나 그가 이 점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가? 해답은 우리가 일찍이 보았던 헬라어들—타 하기아(문자적으로, “거룩한 것들” 또는 “거룩한 장소들”)와 스케네(“장막, 천막”)—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182.1)
 어떤 주석가들, 이를테면 모패트(Moffatt, 117), 웨스트코트(West— cott, 252)와 같은 이들은 어투(語套)가 동일하다는 이유로 8절“첫 장막”6절에 의해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국제역」은 스케네를 6절에서는 “바깥 방[the outer room]”으로 번역했으나 8절에서는 “첫 장막[the first tabernacle]”으로 번역함으로써 독자들을 혼란시킨다.) 즉, “첫 장막”은 성소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8절타 하기아를 지성소로 이해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론에 이른다: 지상의 전체 성소는, 성소가 지성소에 상응하듯이 하늘 성전과 상응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바깥 칸, 곧 성소는 9절에 묘사된 한계성을 지닌 지상의 전체 성소를 예증하였으나, 둘째 칸은 하늘의 전체 성전을 대표하였다고 주장한다. (182.2)
 이러한 해석이 암시하는 것들은 중요한 것들이다. 하늘 성전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그것 자체가 참 지성소이다. (182.3)
 그러나 우리는 히브리서 9:8-9를 다른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우리는 사도가 앞에서 하늘 성전을 언급한(8:1-6) 그의 성소 토론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토론에서 타 하기아는 「새국제역」에 “성소(sanctuary)”로 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평행 표현으로서 스케네“장막(tabernacle)”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9:8-9의 대조는 지상 성소의 두 칸이 예증하는 것들, 곧 성소(the Holy)가 예증하는 지상 성소와, 지성소가 예증하는 하늘 성전 사이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성소들 자체, 즉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를 대조하는 것이다. (182.4)
 만일 히브리서 8:1-9:10을 단숨에 읽어 간다면, 이 해석이 전체 구절을 하나로 묶는 명백한 의미로서 부상한다. 첫 해석이 시사하듯이, 사도가 두 칸들에 대하여 영적 적용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매우 교묘한 것 같고, 이 구절과 히브리서의 다른 곳에서 그가 다루는 방법과 맞지 않다. (182.5)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다음과 같은 의역(意譯)이 히브리서 9:8-9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령이 모세의 성소와 의식으로써 보이신 것은, 하늘 성소로 가는 길이 첫 성소가 그 기능을 계속하는 한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성소는 결정적인 정결을 제공할 제물을 가진 참 성소를 가리키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183.1)
 「새국제역」은 이 견해에 근접한다. 스케네에 대한 그 해석, 즉 “첫 장막(the first tabernacle)”은 모세의 성소 전체를 지칭한다. 하지만 타 하기아“성소(sanctuary)” 대신에 “지성소(Most Holy Place)”로 번역함으로써 물을 흐려 놓았다.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