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10:15-18에서 볼 수 있다. 8:1로부터 꾸준히 진전되어 온 저자의 사상 노선이 여기서 절정에 이르며, 마침내 우리는 여기서 언약에 대한 그의 주안점(主眼點)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로부터 인용한 절로 되돌아가면, 그는 그것의 일부—죄의 용서—만 인용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결같은 그의 주관심사였다. 새 언약이 가져다주는 모든 좋은 것들과 함께, 그것의 주된 유익은 죄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제공하는 데 있다. (175.4)
 언약과 제의(희생 제도)는 사도의 사상 속에 뒤엉켜 있다. 언약에 대하여 그가 처음으로 언급한 때로부터 매 언급은, 그것이 첫 언약을 언급하든 새 언약을 언급하든 간에, 희생 제도와 연결된다: (175.5)
 • 7:22—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맹세 때문에, 그분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 (176.1)
 • 8:6—예수의 더 좋은(즉, 하늘의) 봉사는 그가 중보하시는 더 좋은 언약과 연계된다. (176.2)
 • 8:7-13—옛 언약과 대조되는 새 언약에 관한 토론은 죄의 용서를 제공하는 새 언약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176.3)
 • 9:1—첫 언약은 모세의 성소와 희생 제도를 “가졌다.” (176.4)
 • 9:15-22—각 언약—첫 언약과 새 언약—은 상응하는 희생 제물들—동물들 또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과 새 언약만이 죄의 용서를 제공할 수 있다. (176.5)
 • 10:15-18—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1:31-34에서 예언하셨듯이, 새 언약 하에서는 그분이 결정적으로 죄를 다루실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위한 어떤 희생 제물도 없다.” (176.6)
 이와 같이, 히브리서에서의 언약에 대한 토론은 율법주의나 은혜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의 두 언약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룸에 있어서의 두 국면을 대표한다. 첫째 국면은 인간 제사장과 동물의 희생 제물이 있는 구약 성소와 관련되어 있었다. 모든 의식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규정들을 준수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많은 동물들을 도살함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은 죄 문제에 대한 영구적인 해답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는데, 그 안에서 한 분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면서 자신의 피를 희생 제물로 드리신다. 여기에 우리의 비애와 절망을 친히 짊어지신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여기에 마침내 우리의 절실한 필요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 (176.7)
 우리는 히브리서의 다른 세 곳에서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주시해야 한다. 10:29에서 저자는,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면서,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언급하고 있다. 그 책의 끝부분에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12:24)를 언뜻 말하고 지나간다. 그런 다음, 그의 설교를 마감하는 축도에서, 그는 “영원한 언약의 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13:20). (176.8)
 이러한 언급들은 각기 부수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예수님의 위격(位格)과 사업(事業)에 관하여 지속되어 온 신학적 논증은 이미 결론이 났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각 경우에서 언약은 피에 관하여 말하는 문맥에서 나타나며, 따라서 언약과 희생 제물이 연계된다는 앞서 내려진 우리의 결론을 확증지어 준다. (177.1)
 그런 다음, 우리는 언약 신학이 히브리서에서 매우 다르게 변환(變換)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은혜와 율법주의를 반대하는 갈라디아서 4:21-31에 있는 두 언약에 관한 풍유(諷諭, allegory)와는 판이하게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토론은 갈라디아서가 제시한 것과 모순된다기보다는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다. (177.2)
 히브리서의 언약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8:6“더 좋은 약속”의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 약속들이 더 좋은 것은, 그것들이 남녀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며, 죄의 결정적 제거를 확실히 해주기 때문이다. (177.3)
 그러므로 첫 언약의 실패는 어디에 있었는가?—언약 자체에 있었는가, 아니면 백성에게 있었는가? 그 해답은 양자 모두에게 있었다는 것이어야 한다. 진실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향한 여호와의 의도에 이르지 못했다—그들의 약속은 모래 밧줄과 같았다. 그러나 옛 언약은 그 자체가 흠이 있었다—그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결국, 하나님이 그것을 세우셨다!), 그 자체로서는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답을 결코 제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한시적인 것이었다. 만일 인간이 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야 한다면, 새로운 길, 새로운 소망이 와야 한다—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 (177.4)
 우리가 히브리서 8:1-9:10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마무리지으려 할 때 두 가지 사항이 남는다. 그 두 가지 사항은 저자가 9:1-10에서 제시한 내용에서 다루어진다. (177.5)
 첫 언약의 한계점들
 히브리서 9:1-10은 두 문단으로 뚜렷이 나눠진다—첫 다섯 절은 구약 성소에 대하여 간결히 묘사하고, 두 번째 다섯 절들은 옛 제도의 한계점들을 지적한다. (178.1)
 저자는 그의 토론을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건축한 이동식 성소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에 근거하지 않았으며, 후에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 의해 건축되었고 헤롯 대왕이 재건한 성전에도 근거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은 바울이 여러 번 “장막들(tents)”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3, 4-6절). 하지만 「새국제역」은 바울이 의미하는 것을 모호하게 한다. 그것은 장막(tent)이라는 말(헬라어로는 스케네[skēnē])을 2, 8절에서는 “성막(tabernacle)”으로, 3, 6-7절에서는 “방(room)”으로 번역한다. 이 점은, 우리가 히브리서 서론에서 시사하였듯이, 만일 기록 당시에 제2 성전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다면, 이것은 굉장한 관심사로 등장한다. 그것은 사도가 세계에 알려졌던 당대의 유대인 예배의 중심지였던 그 성전을 간과했음을 의미한다. 대신에, 그는 성소에 대하여 구약 성경으로부터 이론을 전개하였다. (178.2)
 모세의 성소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매우 간결하며, 또 그것의 두 주요 특징—성소와 지성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두 칸들의 각각에 있는 기구들의 여러 항목들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적용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성소에 관한 많은 저술가들, 특별히 재림교인들은 성소의 각 항목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 관련을 시켰을 때, 귀중한 교훈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여하한의 그러한 생각을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5절)는 말로써 잘랐다. (178.3)
 9:1-5에서 그가 간단히 언급한 한 항목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는 분향단을 언약궤와 함께 지성소의 “둘째 휘장 뒤에” 둔다(3, 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지시는 이 금향단이 성소에—“휘장 앞에”—위치하도록 하였다(출 26:31-35; 30:1-6). (17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