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이 만국을 비추고 그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을 “치료”할 것이다. 이러한 뉘앙스는 본문의 구조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본문 앞부분의 ABC(계 22:1~3a)는 뒷 부분 A'B'C'(계 22:3b~5)과 평행을 이룬다. B의 “만국을 소성하기”는 B'의 하나님을 섬기며 비취심을 받는 종들과 상응한다. (266.3)
A//A'
◆ 생명수의 강이 나오고 생명나무에 물을 대는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A, 계 22:1, 2a)는
◆ 그 성의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A', 계 22:3b)와 상응한다.
(267.1)
B//B'
◆ 달마다 맺히는 “실과”“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는 잎사귀”(B, 계 22:2b)는
◆ 하나님을 섬기고, “저희에게 비취”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종들”(B', 계 22:3c~5b)와 상응한다.
(267.2)
C//C'
◆ 인간이 생명나무에 오는 것을 금하는 창세기 3장 14절을 암시하는 “다시 저주가 없겠고”(C, 계 22:3a)는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C', 계 22:5c)와 상응한다.
(267.3)
 그러면 B와 B'의 대구(對句)는 빛과 생명을 연결시키는데, 그 둘은 성경의 사상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16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을 “생명”이라 하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한다(요 1:4). 마찬가지로 예수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약속한다. (267.4)
 잎사귀가 있는 생명나무와 비취시는 하나님의 빛, 그 두 이미지를 겹쳐 놓은 것은 일곱 가지가 있는 촛대, 즉 그 유명한 고대 성전의 므노라의 상징을 밝히 설명해 준다. 빛의 가지가 있는 나무 모양을 한 촛대는 희망의 상징이다.17 생명나무와 빛이 있었던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상징으로서, 그 촛대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열망을 불붙였다. (267.5)
 나무의 실과와 잎사귀가 주는 생명은 충만하고도 완전하다. 생명나무는 육체와 영혼에 공히 영양을 공급한다. 생명을 그렇게 하나의 전체(全體)로서 여기는 접근은 히브리식 사고(思 考)의 전형적인 일면이다. 그 사상은 영적인 생명과 생물학적인 생명을 동일시한다. 히브리어는 생리학적인 생명의 호흡과(창 6:17; 7:15), 영혼(그리스어로는 psuchē), 즉 영적인 차원을(민 27:18; 사 63:10, 11) 표현하는 데 동일하게 루아흐(rua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 루아흐는 인간이 숨 쉴 수 있게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주는 루아흐, 즉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시편의 저자는 그 두 루아흐를 잘 일치시킨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루아흐]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루아흐]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9, 30). (267.6)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차원은 영적인 필요의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도 필수적이며, 그러한 진리는 성경의 가장 첫 부분부터 선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므로 인간 각자는 생물학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인류가 자신을 하나님과 단절시킬 때, 그들은 죽는다(창 2:17; 참조 3:17, 19). 영적인 생명과 육체적인 생명은 서로 엮어져 있다. (268.1)
 새 예루살렘은 육체 없는 영혼들과 천상의 존재들이 사는 낙원도 아니고, 관능적인 쾌락을 즐기는 이슬람의 낙원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총체적인 삶이다. 감각은 촉감, 냄새, 맛 그리고 미(美)의 경험에 잠겨 있다. 구속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피곤, 역겨움, 또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 육체는 전에 없이 강인하다. 사고는 더 깊어지고 삶의 신비들은 더 분명하게 지각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 쉽게 동화되고 그것을 이해한다. 영적·정신적인 능력은 더없이 예리하다. 기억력, 지성 그리고 배우려는 열정은 되살아난다. (268.2)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갈등과 고통의 세상에 머물고 있다. 미(美)는 비참함과 현실을 공유하고, 궁궐 문에는 걸인들이 모이고, 거짓말은 진리를 오염시키며, 죽음의 악취는 모든 생명에 스며들어 있다. 세상은 변화를 소리치고, 하나님의 강림을 부르짖는다. (268.3)
 주(註)
 1) 참조 계 7:15 주석.

 2) 참조 호 2:25; 슥 13:9.

 3) Babylonian Talmud, Sukkah 116a-b.

 4) Mishnah, Sukkah 5. 1.

 5) 예루살렘의 이름 속에 멜기세덱과 이삭의 희생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고 미드라쉬는 말한다. 모리아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예루”는 이삭의 희생을 가리키고, “살렘”은 멜기세덱을 암시한다.(Midrash Rabbah, Genesis 56. 16).

 6) 시 24:3; 사 2:3; 슥 8:3; 사 27:13; 참조 단 9:20; 11:45 등.

 7) Midrash on the Psalms, Psalm 122, section 4; Midrash Tanhuma, ed. Salomon Buber(1885), Numbers, pp. 34, 35.

 8) Babylonian Talmud, Taanith 5a; Tanhuma, Pekudei, 1.

 9) 4 Ezra(2 Esdras) 10:54; 7:26; 1 Enoch 90:28, 29.

 10) 이 표현은 Johannes Pedersen, Israel: Its Life and Culture(London: 1926–1940), vols. 1-2, p. 464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참조 Reymond, LÉau sacree, p. 213: “The Old Testament often identifies the ocean with death .. a place of no return ∙∙∙ a place where there is no communion, neither with humans nor with God.”

 11) Doukhan, The Genesis Creation Story, p. 70ff를 보라.

 12) Kittel,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3, pp. 447~450.

 13) Roberto Badenas, “New Jerusalem—The Holy City”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2, ed. Frank B. Holbrook,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1992), vol. 7, p. 246을 보라.

 14) 시 1:3; 사 65:22; 참조 레 26:4; 삿 9:8~13.

 15) 그리스어 세라페이아(therapeia) 및 연관 동사인 쎄라페우오(therapeuō, 참조 영어의 “therapy” [치료])에도 동일한 의미가 있다. 두 단어 모두 “[어떤 사람 또는 무엇을] 돌보다” 또는 “어떤 사람 또는 무엇을 섬기다”라는 의미가 있다(행 17:25; 눅 12:42 등을 보라). 따라서 70인역에서 이 단어들과 또 그것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히브리어 어근 'bd를 번역하는 데 쓰인다. 그 단어에는 섬김 또는 하인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창 45:16, 사 5:2 등을 보라).

 16) 욥 3:20; 33:30; 시 49:19; 56:13 등.

 17) Carol L. Meyers, The Tabernacle Menorah,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Dissertation Series(Missoula, Mont: 1976), no. 2, p. 118ff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