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정신에 따라서 유대 전승도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위에 있는 예루살렘”(예루샬라임 셸 마알라[Yerushalayim shel Maalah]이 실제로 존재하였고,7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음을 확인한다.8 유대 계시 문헌에서는 세상의 도시들 위로 하늘 예루살렘과 성전이 내려올 것으로 본다. “인간의 어떠한 건축물도 지극히 높은 분의 처소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9 신비주의(Kabbalistic) 랍비 바흐야 벤 아셰르(Bahya b. Asher)에 따르면, 히브리어에 서 예루살렘이 복수형(예루샬라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땅에 하나, 하늘에 하나, 이렇게 두 예루살렘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261.1)
 하지만 과거의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과 비교조차 하기 어렵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첫 마디는 새 예루살렘을 창조의 차원에서 묘사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이사야서에 있는 평행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창조를 가리킨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사 65:17, 18). (261.2)
 새 땅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바다”가 없다(계 21:1).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첫 번째 특징이다. 히브리적인 사고(思考)에서 “바다”는 공허와 암흑(창 1:2; 시 18:12; 욥 26:10; 잠 8:27), 죽음과 “부존재”10(不存在, 겔 26:19~21; 욘 2:6; 합 3:10) 그리고 악(사 27:1; 51:9, 10)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성경은 또한 “바다”를 바벨론(계 16:12)과 연관시키고, 계시록에서는 짐승이 올라온 곳(13:1)이라고 언급한다.11

  (261.3)
 예루살렘을 수식하는 카이노스(kainos)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다른”12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을 새롭게 배치하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게 한다(계 21:2; 참조 계 3:12). 그 성은 6일 전쟁의 그 예루살렘이 아니며, 오마르 모스크가 있는 곳도, 통곡의 벽이 있는 곳도, 성교(聖墓) 교회가 있는 그곳도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새로 페인트를 칠하거나 도로공사를 한 성이 아니다. 그 변화는 근본적이고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262.1)
 인격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위로를 의미한다. 그것 이 계시록이 알려주는 첫 번째 진리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4절). 여기서 눈물은 곡과 마곡의 대학살이나 영원히 멸망당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 문맥은 과거의 모든 상처들을 설명하는 “모든 눈물”을 시사한다. 사망과 고통처럼, 눈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262.2)
 인간의 고통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심각한 원망이다. 그 하나님은 고통 중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나님이다. 고통과 압제의 때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군인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린 소녀의 눈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그 손으로 그것을 닦아주신다. 하나님은 아무 말이나 설명도 없이, “다시 눈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그저 행동으로 보여 주신다. 그것은 궁극적인 위로이며, 고통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다. (262.3)
 그렇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내려온다. 그것이 선지자가 본 구절에서 새 예루살렘의 장대함에 대한 묘사를 미루고 있는 이유이다. 계시록에서 처음으로 선지자의 이상이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고 금 도성 예루살렘이라는 하나의 특정한 실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가 인류의 최종 목적지이다. 그렇지만 그 성에 대한 묘사는 일반적인 데서부터 특정한 사항으로 전개된다. 선지자는 그 성이 하늘로부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묘사한다.13 그 이상은 두 편의 파노라마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천사가] 내게 보이니”라는 말로 시작한다(계 21:10; 22:1). (262.4)
 주변부로부터 중심으로 진행해 가면서 그 이상은 일곱 가지의 경이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첫째 파노라마(계 21:10~27)가 보여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 성 전체가 수정 같이 빛난다.

 (2) 그 문과 성벽들은 귀한 보석들로 되어 있다.

 (3) 주(主) 광장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


 둘째 파노라마(계 22:1~5)는 다음과 같다.

 (4) 생명수의 강이 있다.

 (5) 생명나무가 있다.

 (6)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7) 주 하나님이 친히 계신다. (263.1)
 빛의 도성
 새 예루살렘은 신뢰, 감탄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새롭고도 완전한 환경이다. “크고 높은 성곽”은 성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계 21:12). 성의 각 변을 측량하면 길이가 12,000스다디온(약 2,200킬로미터)이다. 그 성곽은 열두 기초 위에 세워져 있고 길이는 144규빗(약 60미터)에 이른다. 그 성 전체가 이스라엘 지파의 수인 12에 기초해 있고, 그들의 이름은 문에 쓰여 있으며(계 21:12; 참조 7:4~8, 그 중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 12 × 12,000 = 144,000이 있다), 열두 사도의 이름도 성의 기초 위에 새겨져 있다(계 21:14). (263.2)
 하나님은 그 주민들을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그 성을 설계하셨다. 그 보다 더 잘 맞을 수는 없다. 그 건축가는 창조주 자신이시고, 그분의 피조물들의 필요와 소원을 완벽하게 알고 계신다. 열두 문은 네 방향으로 열려있어(13, 25절) 새 예루살렘 거민들 사이의 수용성과 신뢰감을 증언한다. (263.3)
 성문의 기초석들은 각각 다른 보석으로 되어 있다(19~21절). 각 보석은 서로 경쟁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성의 다양한 측면을 이루는 데 한몫을 한다. 평화와 신뢰가 온 인류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다.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세 목록 모두 마지막 부류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나와 있다(계 21:8, 27; 22:15). (263.4)
 그러나 그 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의 범위를 한정한 것이 단지 실제적인 필요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 성은 또한 아름답다. “신부가 단장을 한 것 같”다(계 21:2). 그리스어 동사 코스메오(kosmeō, 영어의 “cosmetics” [미용, 화장품]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그 성의 미적(美的)인 특성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미 “장(長)과 광(廣)과 고(高)가 같은” 그 성의 조화롭고 대칭적인 비율을 보았다(16절). 그 성은 옛날 성전의 지성소(왕상 6:20)처럼 완전한 정 육면체를 이룬다. 촛대에 대하여 설명할 때 보았던 것처럼, 지성소는 인류가 고대하는 새 예루살렘을 연상하게 한다. 그 연관은 인간의 예배 행위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증언한다. 종교란 하나님 나라의 빛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264.1)
 우리는 또한 성의 건축에 사용된 귀한 재료들을 주목한다. 그 성은 순금과 보석들로 되어 있다(계 21:18~21). 그것들을 연합시키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다양성도 빛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빛나는 임재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23절). 그 성은 성벽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황금 성전처럼 풍부한 색조와 다채로운 빛을 반사하며 서 있다. (264.2)
 생명의 도성
 새 예루살렘은 또한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에덴동산을 연상케 한다(창 2, 3장). 그곳에는 번성한 식물, 수정 같은 물, 특별히 “생명나무”도 있었다(참조 계 2:7).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 2). (264.3)
 

 일찍이 선지자 에스겔도 그 강과 불가사의한 나무들이 있는 놀라운 동산을 이미 예견했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12). 나무의 상징은 성경에 퍼져 있고,14 고대 중동 문명에도 도처에 다양한 모양으로 산재해 있다. 에덴동산에 처음 나왔던 개념처럼, 어느 경우에나 나무는 생명을 상징한다. 인간 남녀는 그 실과(實果)를 먹고 살았다.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들의 생명은 위협을 받았다(창 3:22). (264.4)
 새 예루살렘의 나무는 그 전체가 유익을 끼친다. 그 실과와 잎에는 목적이 있다. 본 구절에서는 그 열매의 특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 열매는 1년 내내 열려 익어 있고, 그 도성 주민들의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해 준다. 한편,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치료] 하기 위하여 있”다. 본문은 약초를 이용한 요법(療法)이나 어떤 형태로든지 식물을 사용하는 의학적인 치료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망이 사라졌다는 말에는 나쁜 세균이나 다른 질병들도 다 없다는 의미가 있다. 본문은 또 다른 해석을 시사한다. (264.5)
 

 앞선 절들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또는 광채가 “만국”이라는 말과 함께 나온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 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3, 24: 참조 21:26). “만국을 소성케” 하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만국을 비춘다는 의미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의 또 하나의 기적이며, 그 사실은 선지자들을 놀라게 했고, 이는 초 막절의 핵심에도 새겨져 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266.1)
 열방27(고임)은 전통적으로 언약에서 배제되었고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에 무지한데, 이제 그분을 경배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이사야서 60장 1~19절도 같은 주제를 진술한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네 빛이 이르렀고 ∙∙∙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 나아오리라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리라].”

27) 개역한글판에서 “열방”“만국”으로 번역한 말은 동일한 단어이다(역자 주).
(2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