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금 도성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1~22:5) (253.1)
 숙코트
 새 예루살렘의 강림은 계시록의 마지막 예언적 사건이며(예언적 사건들 도표를 보라), 구조적으로는 계시록의 서두에 있는 일곱 교회들과 대응된다. 두 기사는 몇 가지 공통된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새 예루살렘(계 21:10), 하나님의 광채(계 21:23; 참조 1:16), 하나님의 백성위에 새겨진 그분의 이름(계 22:4; 참조 3:12), 생명나무(계 22:2; 참조 2:7) 그리고 생명책(계 21:27; 참조 3:5) 등이다. 두 기사 모두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을 선언하고(계 21:7; 참조 2:7, 11, 17, 26; 3:5, 12, 21), 하나님을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고 부른다(계 21:6; 참조 1:17; 2:8). 두 기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계시록의 몇 단락들에 속한다(계 21:3; 참조 1:10). (255.1)
 또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언급이 두 기사에 앞서 나온다. 일곱 교회의 기사 직전에는 인자가 땅의 촛대들 사이에 다니는 장면이 있다(계 1:13). 이제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과 거룩한 도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다(계 21:1, 2). 그리고 그는 보좌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듣는다(3절). 그 다음 여기 새 예루살렘의 문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땅의 백성 사이에 거하시는 것을 본다(계 21:1~8). (255.2)
 이상의 서두에는 또 의례의 장면이 등장한다. 유대력에서 제일 첫 절기인 페사흐(Pessah)가 일곱 교회의 기사 앞에 나왔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유대력의 마지막 절기 인 숙코트(Sukkot), 즉 초막절을 연상하게 한다. (256.1)
[예언적 사건들]

 

  (256.2)
 계시록은 숙코트, 즉 초막절 문맥에 쓰인 것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새 예루살렘을 그 절기와 연관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핵심 구절은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가 되겠다. (257.1)
 “장막”은 그리스어 스케네(skēnē)를 번역한 말이다. 그 그리스어 낱말은 히브리말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것의 물리적인 표시였던 셰키나를 반향한다(출 40:34~38). 또한, 셰키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는 스케눈(skēnoun, 거하다, 천막을 치다)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 동사 샤칸(shakan, 거하다)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1 그러한 배경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는 점을 요한계시록 21장 3절이 강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57.2)
 새 예루살렘은 성전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단순히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가 될 것이다. 뒤에서 본문은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새 예루살렘과 옛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새 도성에서는 그분의 임 재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던 성전을 하나님의 실제 임재가 대체할 것이다. 에스겔서도 동일한 패턴을 따라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가 그 도성에 계신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26)라 하리라”(겔 48:35).

26)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역자 주).
(257.3)
 마침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그분과 그 백성 사이에 진정한 친교가 드디어 가능하게 되었다. 계시록은 이것을 언약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2 그것은 아가서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 7:10). (258.1)
 결혼 관계의 은유와 부자 관계의 은유는 둘 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증언한다. 그 백성은 거리, 죄 그리고 오류의 문제가 없이, 또한 제사장이나 어떤 의식(儀式)의 중재가 없이도 마침내 직접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를 하나님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거절하셨던 일이(출 33:20~33) 이제는 매일의 일상이 된다. “[그들이] 그[하나님]의 얼굴을 볼 터이요”(계 22:4). (258.2)
 우리가 함께 살며 대화하고, 웃고, 먹고, 생각하는 남자와 여자들처럼 하나님이 거기 물리적으로 계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로나 생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막절의 경험을 무한히 확대한 것이다. 그 절기의 이름(숙코트, 즉 초막)은 백성이 그 절기를 경축하기 위하여 나뭇가지와 줄기로 만든 임시적인 거처에서 비롯되었다. 그 풍습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것과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중에 계신 것의 상징으로 만든 하나님의 숙카(sukkah), 즉 성소를 건축한 것을 기념한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샤칸]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258.3)
 유대 전승에서 숙카는 성소와 마찬가지로 셰키나를 상징하였다.3 숙카 안에서 읽었던 시편들은 그러한 상징에 대하여 증언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보호하심에 대하여 말한다(시 23; 27; 36; 57; 63; 91). 게다가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특성상 숙카는 세상 도성들의 불확실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 하늘 왕국에 대한 열망을 강화한다. 지붕을 덮은 가지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서 그 틈새로 우리는 하늘을 볼 수 있다. 초막절의 예식서(禮式書)로는 전도서를 읽었는데, 그 내용에 우리의 인생, 행위, 거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특히 전 2:4 이하를 보라). 우리는 동일한 희망의 교훈이 “수장절”(收藏節, 출 23:16; 34:22)이라는 그 절기의 별명에도 새겨져 있는 것을 보는데, 그 또한 수확의 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259.1)
 계시록에서 초막절에 대하여 암시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킵푸르(계 11:19), 곡식과 포도의 수확(계 14:14~20; 16:17, 18), 아사셀 의식(계 20:2, 3) 그리고 진영을 악으로부터 정결하게 하는(계 20:7~15) 모든 일 후에 땅의 사방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큰 수확이 이어진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계 21:3) 일반적인 표현을 보면 그 회집(會集)의 보편성을 알 수 있다. 선지자 스가랴는 이미 초막절의 그리스도적인 분위기를 보았었 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계시록의 선지자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4). (259.2)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목마름이 마침내 해소된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계 21:6; 참조 22:1). 그런 이미지는 초막절의 문맥에서도 나타난다. 그 절기에 제사장은 아침과 저녁의 희생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실로암 못으로부터 황금 항아리로 물을 걷는 풍습이 있었다. 백성은 그가 돌아올 때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하고 노래하면서 맞이하였다.4 예수님이 초막절 기간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말할 때 암시하였던 것이 바로 그러한 풍습이다. (259.3)
 새 예루살렘
 계시록은 모든 소망에 대한 성취, 세상의 모든 열망에 대한 대답, 모든 목마름의 해소(계 21:6), 하나님의 도성의 강림을 마지막 요점으로서 제시한다. 모든 것이 다 “이루었도다”(6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성의 이름 “예루살렘”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옛 이름인 “살렘”에 내포되어 있듯이,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이다. 그곳은 아브라함의 군사 원정을 응원했던 의의 왕 멜기세덱의 도성이다(창 14:18; 참조 히 7:1). 예루살렘 도성은 또한 모리아 산 위에 건축되었고(대하 3:1), 그러므로 이삭의 희생을 암시한다(창 22:1~18).5 예루살렘은 또한 이스라엘이 온역으로 죽어갈 때 하나님이 그 치명적인 칼을 멈 춘 곳이기도 하다(대상 21:14~16). (260.1)
 다윗은 그곳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제1 수도로 삼고(대상 11:1~9), 언약궤를 그 성벽 안에 모셨다(삼하 6:12~23).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집단 기억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을 성전과 연관시킨다. 예루살렘은 기도와 예배의 장소이다(시 48:2; 122:1). 그 도성은 또한 바벨론의 반대편으로서 유수로부터의 귀환과 압제의 끝을 상징한다. 그곳은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도시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루살렘을 잊을 수가 없다(시 137). (260.2)
 이러한 기억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 도성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를 대표하였고, 그곳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으로 빛나는 성도의 피난처였다(시 48:1~3). (260.3)
 다니엘 선지자 역시 하늘 예루살렘을 마음속에 그렸다.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지상의 나라들 너머로(단 2:35), 선지자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나라”(44절)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전통적 상징인 산(山)과 같은 모양으로 있는 것을 본다(35, 45절).6 (2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