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14 장  안식일에 있어서의 쉼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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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쉼의 의미
 쉼이 무엇인가? 적어도 한국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는 숨을 쉰다하여 쉼이었다. 쉼은 숨쉼의 약자이며 목숨은 목줄에 숨이 붙어 있다는 말의 줄임 말이다. 인생에게 쉼은 바로 숨이요 목숨이며 생명인 것이다. 안식일의 쉼의 메시지는 쉼이 숨이라는 안식, 쉼이 목숨이라는 인식 위에 설 때 비로소 바르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예수님의 초청이 생명의 초청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24.1)
 어찌하여 인생에게 쉼은 곧 생명으로 경험되는 것이냐?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엮어온 고통스러운 삶의 구체적 정황에서 그대로 자명해 진다. 삶의 수고, 그것은 곧 죽음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안식일 쉼의 배경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이며 안식일 쉼에 대한 복음적 인식의 출발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의 정황에 대한 공감과 동참과 연민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절실한 인식 위에서 출발하지 않은 안식일 쉼의 설교는 가짜이며 헛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도 마땅히 그러한 감정을 촉발시켰던 바, 안식일의 계율적 이해의 가장 혐오스럽고 잔인스럽게 느껴지는 성격은 바로 그같은 태도의 배후를 이루고 있는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몰인정한 인간관이다. (124.2)
 그 동안 한국 땅에서 안식일의 메시지가 동포들로부터 그 응분의 반향을 얻지 못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도 재림교회의 안식일 메시지가 몰인정한 바리새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풍기었다는데 있으며 그같은 바리새주의적 경향은 인간의 삶의 고통스러운 국면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의 결핍에 대부분 기인했다. 이른바 “구원”이라는 약품을 선전하고 있지만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가 절실히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상 숱한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의 비정한 타락은 대부분 이같은 인식 곧 구원이 요청되는 인생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정황에 대한 인식이 둔감해지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125.1)
 안식의 하나님
 재림교회는 자신의 안식일 메시지에 의해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안식일 기별은 재림교회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기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에 우리들이 우리들의 안식일 신앙을 통해 나타낸 하나님은 과연 쉼이 없어서 숨이 넘어가려는 고달픈 인생들에게 숨돌릴 틈을 여시는 목숨의 목자이셨는가(다윗은 그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라 하였건만). 아니면 절대자 어마어마한 권위를 등에 업고 더욱이나 가당치 않게 “안식일” 이란 허명을 앞세워 인생의 지친 목숨을 옥죄어온 “하나님”이란 이름의 괴물이었는가? (125.2)
 “안식의 하나님”이란 애매한 표제를 내세운 데는 그 나름의 목적이 있다. 필자는 “안식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뜻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안식에 골몰한 나머지 극진한 공양과 섬김으로 당신을 안식케 하라고 우리를 닥달한다는 뜻인지를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한국 재림교회가 안식일 기별로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위의 둘 중 어느 쪽인가? (125.3)
 신을 위해 인간들을 동원하고 착취하는 형태의 모든 안식일 신학은 성경의 종교와 대립하는 모든 사이비 종교들의 핵심적 특징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종교들은 거짓 종교인 것이다. 이같은 종교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안식일 얻지 못하여 공중을 헤매는 귀신들로 가득 차 있다. 시집 못 가고 장가가지 못해 죽은 처녀 귀신과 총각 귀신들도 그 중의 하나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안식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기는 서열이 높은 신들도 마찬가지이었다. (126.1)
 그런데 이 신들을 불안한 채로 그냥 놔두면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이 편안치 못했다. 사람들이 안식을 누리려면 먼저 그 신들을 안식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인생들은 변덕스러운 신들을 편안케 하기 위한 공양과 시중에 쉴 날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관은 이같은 “신들의 안식” 사상과 어느 만큼의 거리를 갖는 것일까? 성경의 하나님을 이같은 이교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도 기독교 시대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126.2)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안식을 위해 우리의 공양과 우리의 쉴 새 없음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대신 무거운 삶의 짐에 지쳐 숨을 몰아쉬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쉼으로 초청하시며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시 68:19) 하나님이시다. 인생은 변덕스러운 신들의 밥이 아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기르시는 백성”(시 96:7)인 것이다. 신들을 위한 공양으로 우리를 쉴 새 없이 만드시는 이가 아니라 우리의 쉼을 위하여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시는 분”(요 5:17) 이시다. 이분이 바로 “안식일의 하나님”이란 표현과 함께 우리가 전하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이다. (126.3)
 일과 수고와 쉼
 안식일 계명에 있어서 쉼은 결코 일의 대립 개념이 아니다. 성경은 절대로 일을 저주로도 형벌로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에덴 동산에서 인류는 일을 했으며(창 2:5) 일은 그들에게 축복이었다. 따라서 낙원을 일없는 삶의 터로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현저한 이교적 특성이다. 그러나 쉼은 수고의 대립 개념이다. 낙원에는 수고가 없었다. 수고는 타락의 산물이었으며 에덴 동쪽의 현상이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쉼과 노동의 분열이 이루어졌고 쉼과 분리된 노동은 수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이제는 일이 아니라 수고가 인간의 운명이 되었으며 수고하는 운명이 바로 인간 불행의 핵심적 요인이 되었다.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창 3:17) 되었다. (127.1)
 노동의 이같은 현실이 노동에 대한 모든 이교적 왜곡의 기초이다. 일은 인간 경험에서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키는 거룩한 경험이 아니었다. 대신에 일은 인간의 품위를 파괴하며 자존심을 욕되게 하고 체력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노동은 곧 인간의 불행 자체이며 구원과 극락과 신들의 반대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노동을 적게 할수록 고귀한 사람이며 노동이 적은 세계일수록 하늘에 더 가깝고 신들도 그 노동량이 적을수록 상위의 반열에 속한다. 최고 절대의 신은 절대 안일의 신이었던 것이다. (127.2)
 영지주의 신학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신약의 하나님보다 하위의 신으로 주장한 것도 구약의 하나님이 창조의 신 곧 노동의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관에서 볼 때 일의 신, 작업의 신은 최고 절대의 신일 수가 없었다. 초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상과 싸워야 했다. 사도신경 제1조에서 창조주가 절대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이같은 이교 신론과 피나는 투쟁의 증언인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작업의 하나님이시며 바로 이 일의 하나님이 유일 절대의 하나님이시다. 일은 천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일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것이며 따라서 신성한 것이다. (127.3)
 이와 같이 일은 태초에 고통이 아니며 일은 태초에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일은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수고의 이미지로 뒤덮이게 되고 쉼과 거룩한 행복의 반대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노동과 기쁨의 긴장, 노동과 거룩의 긴장은 인간의 타락으로 결과된 비극적 현상이다. (128.1)
 그러나 비록 그렇기는 해도 아직도 인간의 노동에는 에덴 시절의 기쁨과 보람과 거룩함의 맹아를 지니고 있으며 낙원의 회복과 함께 노동의 참 모습도 회복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는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일을 통하여 약속하는 쉼은 단순히 수고스러운 일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은 수고로부터의 해방된 삶으로의 초청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류의 일로 부르는 초청이다. 다른 차원의 질을 가진 일들로의 초청이고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일 경험으로의 초청이기도 하다. 삶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삶이 아니듯이 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일이 아니다. 땅의 일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이 있다(행 1:3). 일 가운데는 구원과 거룩함의 경험으로써의 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안식일에도 일을 하겠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에는 우리가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야 한다”(요 9:3).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창조의 일이다. 생명을 낳고 생명을 치료하고 생명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사람의 눈에 바르는”(요 9:6) 일이다. 진흙으로 사람을 빚고 거기에 생기를 붓는 일이다(창 2:7). 또 실로암(보내심을 받은 자)에게 가서 씻게 하는 일이다(요 9:7). 따라서 안식일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함정은 일의 수고로 고통스러워진 삶의 정황을 강조하고 고통스러운 수고로부터의 해방을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안식일 신앙에 내포된 차원 높은 일의 성격과 의의가 소홀히 취급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데 있다. (128.2)
 안식일 계명은 단순히 쉼의 계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과 쉼의 계명이다. 제칠일에 국한된 생활규범이 아니라 7일 전체에 걸친 생활 규범이다. 그래서 안식일 교인이 안식일의 가치관을 통하여 이 세계에 기여하는 부분은 쉼의 가치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함께 일하는 가치에 대한 정당한 인식 곧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한 가치를 안식일 신앙을 통하여 바로 알게 하는 일인 것이다. (129.1)
 안식일 신앙의 사람들
 따라서 안식일을 전하고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무릎 앞에 삶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누리는 백성들이다. 그리고 안식일의 쉼의 경험을 통하여 제칠일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하나님의 쉬게 하심의 경험을 고양하고 심화하는 백성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과 함께 이웃들의 짐을 지는 백성들이다. 그들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안식일에도 일하는 백성들이다. 예수님처럼 안식일에도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먼 사람들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6, 7)하는 백성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쉼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쉼 없는 사람들의 쉼을 위해 자신의 삶을 쉴새없이 사는 백성들이다. (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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