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요 12:32)? 마치 호프 다이아몬드(Hope diamond)와 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은 화려한 광채를 발한다. 한쪽 방향에서만 바라본다면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다 볼 수가 없다. 그 광채의 화려함은 그 표면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무지개 빛깔의 영롱함 속에서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감화력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66.1)
다양한 측면을 가진 그리스도의 희생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성소에 여러 종류의 제사들이 왜 있었는지 설명해준다(레 1~7). 모든 구약의 옛 제사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요 1:29; 히 9:25~28). 그러나 어떤 희생 제사도 하나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의 기본적인 면조차도 다 나타내지 못한다. (66.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생리학 교과서가 인체 기관들을 각 부분으로 해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펼쳐 놓는다. 레위기는 어떻게 보면 가축들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는 일종의 가축 생물학 안내서 처럼 보인다. (66.3)
그러나 우리가 레위기 전체의 큰 그림을 이해하게 되면 레위기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폭발물과 같은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구세주를 영원히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 놓을 것이다. (67.1)
우리가 호프 다이아몬드에 다가갈 때 그 아름다움에 끌리지만 잠시 동안 주목해서 본 후에 자연사 박물관의 다른 진귀한 보석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왔다가 떠난다.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다르다. 자신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에 오그레이디 대위가 헬기에 끌렸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그분께로 끌어당기신다. 그분의 희생의 다양한면들은 아름다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그 다양한 면들이 우리와 접촉되어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한다. (67.2)
이스라엘의 각 제사의식 간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다양한면들을 강조한다. 가장 큰 차이는 피와 고기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제단의 어디에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졌는가? 그 고기는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다음의 도표는 주요 제사들의 종류에 따라 제물의 피와 고기가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간략하게 보여준다. 이탤릭체로 강조된 부분은 그 제사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67.3)
예를 들어 도표를 보면 오직 번제에서만 모든 고기가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8.1)
나중에 우리가 이 제사들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각각의 제사들의 독특한 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지 간략하게 미리 살펴보자. (68.2)
번제물의 고기는 하나님의 제단 위에서 불탈 때 하나님께 드려졌다. 누구도 번제물의 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완전히 태워진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인 희생으로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68.3)
소제가 여호와와 제사장에게 돌아가기는 했지만 소제에는 확실히 피나 고기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은 것에 감사하는 기본적인 음식 제사이다. (68.4)
화목제(well-being offering, [“화평제”이나 “친교제”으로도 번역됨])로 드려진 제물의 고기 중 일부는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이 먹었다. 이러한 제사는 그들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유익성을 예시하는 것이다. (68.5)
속죄제(또는 “정결제”)에서 피는 성소 바깥 제단(=번제단)의 사면에 뿌려지지 않고 바깥 제단이나 분향단의 뿔들에 발라졌다. 그 피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생명을 대속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68.6)
속건제의 피는 속죄제처럼 그 피가 단의 뿔들에 발라지지 않았다. 속건제는 하나님께나 인간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보상/배상을 한 후에 드려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잘못들을 바로 잡으려고 우리가 모든 책임을 떠맡는다 할지라도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갚아지는 빚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68.7)
오직 우리가 제사에 관한 모든 것 살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균형 잡힌 그림을 갖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가 지은 죄들에 대한 죄 값을 치르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은혜가 모두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 둘 중에 하나가 없는 것은 마치 산악자전거의 두 바퀴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여러분은 그런 균형을 잡기 힘든 외발 자전거를 타고서는 결코 먼 거리를 가지 못할 것이다! (69.1)
비록 레위기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한 지식들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자주 무시되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신약성경으로 넘어가서 “실체”(real thing)에 관한 것을 읽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체”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교과서인 구약성경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의과대학생은 사람의 신체를 사진들과 그림들을 가지고 설명해주는 교과서들을 공부하는데 이는 나중에 의사가 되어 실질적으로 환자들을 검진할 때 그가 보게 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69.2)
레위기가 등한히 여겨지는 또 다른 이유는 현대의 성경 독자들은 모든 피와 피 흘림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짐승의 희생 제사들은 나와 같이 동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축들을 식용으로 잡았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사랑의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심지어는 작은 참새까지도(눅 12:6)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 어떻게 그분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많은 짐승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실 수가 있으셨을까? (69.3)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민감하신 분이시다. 매번 짐승이 죽임을 당할 때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백성들이 하나님과 죄 중에 하나를 선택한 결과인 생명과 사망을 백성들에게 명심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제단으로의 초청이다. (70.1)
백성들이 영원한 결말에 대해 일깨워져서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사와 같이 우선은 과격하고 심지어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방법을 기꺼이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혹독한 자비에 대한 또 하나의 예로 에스겔의 아내의 경우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점령당할 것을 백성들에게 나타내는 표로서 여호와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겔 24:15~27). 그것은 선지자 에스겔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설교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이(참고 요 11:11~14) 일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통해서 그녀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70.2)
우리가 짐승의 희생 제사를 연구할 때 우리는 짐승들이 도살될 때 고통이 최소가 되도록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짐승들의 목은 길게 베어졌고 곧바로 출혈로 인한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도살될 때의 고통은 희생 제사가 가리키는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