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7 장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 신학
 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Frederick F. Bruce)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진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사건 그 자체를 제외하고 어떤 단일 사건도 바울의 회심과 파송처럼 기독교 역사에서 결정적인 것은 없다.”1 사실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을 바울의 생애와 그의 바리새주의 신학의 전환점으로 고려할 수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세 번 그의 삶을 변화시킨 이 사건에 대해 개인적인 증언을 한다(9, 22, 26장). 빌립보서에 나타나 있는 이 사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평가는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그의 이해와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의 관점이 얼마나 완전하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빌 3:3-12). 그에게 있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는 그의 신학, 경건, 그리고 희망의 중심이 되었다. (112.1)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그를 “사로잡았다”(빌 3:12)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에게로 회개한 것은 그 자신의 신학적 사유나 구주를 찾은 결과가 아니다. 사실, 그는 그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여겼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하였다. (112.2)
 바울의 구속사적 견해
 바울에게 있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모세의 토라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바울로 하여금 새로운 메시아적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도록 새로운 출애굽을 통하여 그를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의 율법 중심적 신학과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구속적 관계의 영향을 이전에 토라를 자랑하던 것을 완전히 역전시켰다고 묘사한다. (113.1)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113.2)
 바울은 그가 랍비들의 바리새주의에서 경험한 것과 같지 아니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의 계획으로 나아갔다. 이제 그는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이방인도 포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더 넓은 견해를 깨달았다. 바울에게는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율법을 순종하지 않고 택함을 받아 “의롭게 된 것처럼 메시아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기초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분명해졌다(롬 4장; 창 15:5-6과 비교). (113.3)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과 이스라엘의 선택을 바리새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샌더스(E. P. Sanders)는 이러한 바울의 진전된 견해를 명확히 설명하였다. “율법이 잘못한 것, 즉 유대주의가 잘못한 것은 약속과 언약과 율법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전 세계의 구원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2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나 “율법의 의”로부터 오며,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요구 조건이라는 입장을 공격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 신자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었다. 바울은 이것을 오직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경에서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고 주장하였다. (114.1)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울이 유대인의 언어 개념으로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과 그 행위를 거절한 것은 이론적인 도그마도 아니요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의와 생명을 부여하신 것에 기초하고 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3 (114.2)
 바울의 복음 기별이 어떤 철학적 개념이나 종교적 느낌에 뿌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깨달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신약 학자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계시는 성경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창조한다.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개입에 근거한 새로운 해석의 특징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메시아 시대의 실현을 선포하시고, 그것을 그의 치유 사역으로 확인해 주셨다(막 1:14-15; 눅 4:16-21; 19:10 참조). (114.3)
 바울은 그의 구속사적 견해를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 서신은 바울이 어떤 유대 기독교의 다른 선교사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갈 1:6-9)과 싸우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한 것인데, 그들은 여전히 율법과 율법 중심적 견해를 고수하고 있었다.4 이러한 변증법적 배경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15.1)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115.2)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안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두 세대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모세 시대와 메시아 시대이다. 그러나 그의 부담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하여 오셔서, 그들에게 “아들의 명분”(huiothesia)을 선물로 주시고, 그 결과 그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후사들로 삼으시려 하신다는 진리이다. 바울의 관점은 이것이다. 이 “아들”의 신분은 율법 준수에가 아니라 침례 의식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음,”“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 되는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갈 3:26-29). 이것이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되고 약속의 후사가 되는 새로운 길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 8:17)라고 명백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됨”은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왕국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115.3)
 리더보스는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을 명확히 설명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 됨’이다(갈 3:26). 즉 그것은 그의 오심으로 그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구원을 가져오는 종말론적인 분이시다. 그는 그에게 속한 이들과 하나이시다. 이 새로운 구속적 신분이 주어졌다.5 (116.1)
 그러나 이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 됨”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 적인 믿음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오직 이 믿음이 “율법의 지배”“몽학선생의 교육”을 끝내게 한다(갈 3:23-25; 헬라어 paidagogos). (116.2)
 바울은 또한 새로운 “아들”의 신분을 각 신자의 마음속에 주시는 성령의 선물과 밀접히 연결시켰다. 그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고,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서 경험하게 되었다(롬 8:1417 참조).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과 거룩케 하는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권능을 베푸시고, 그들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새로운 순종을 이끄신다.6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게 하신” 증거라는 확신을 주고자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축복의 후사로 삼으심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116.3)
 영국 학자 데이비스(W. D. Davies)는 바울에게 초림 시에 “장차 올 시대가 현재의 사실이 되었다. 그 증거가 성령 강림이다 ∙∙∙ .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에게는 성령 강림을 의미하였다 ∙∙∙ .간단히 말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성령을 발견하였다”7고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반복해서 메시아 시대는 여전히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것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하여 진술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헬라어 telos‘끝’ 혹은 ‘목적’을 의미]이 되시니라”(롬 10:4). (116.4)
 이 구절에 대한 현대의 연구들은 바울이 여기서 “율법”(notnos)이란 용어를 토라 즉 성경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도덕법이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인기 있는 복음주의적 견해는 유지 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배드나스(Robert Badenas)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바울이 증명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의 좌절이 아니라 반대로 성경에 예고된(10:4) 바로 그 텔로스(telos)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프로쎄시스(prothesis, ‘뜻’)가 가리키는 정점이며(9:11) 구원의 무스테리온(mustérion, ‘비밀’)을 이해하는 열쇠(11:25)이다.”8 배드나스는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목적론적 범주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117.1)
그리스도가 인간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요 절정이기 때문에 이어지는 것은 그가 성경 이해의 열쇠라는 것이다 ∙∙∙ . 그러므로 바울의 회심은 또한 “해석학적 회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토라를 “율법 외”(chôris nomou, 3:21)의 다른 관점에서, 그러나 바로 그 목적과 목표이며(3:21), 그것의 약속, 예언, 표상, 그리고 예시에 온전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것의 텔로스인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읽을 수 있다.9
(117.2)
 바울의 해석학적 출발점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 언약이 약속하는 메시아라는 그의 확신이다. 이 메시아 신앙이 토라에 대한 그의 존중을 허물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존중은 무한히 그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그는 율법 그 자체를 더 이상 목적으로 보지 않고 다만 수단으로 본다. 분명히 바울이 유대인을 비난한 것은 그들이 율법,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것 때문이었다”(9:31-32).10 (117.3)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롬 1:2; 16:25-26 비교)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본 “빛”을 하나님이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고후 4:6) 말씀하실 때의 첫 창조의 빛에 비유하였다. (1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