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병거 제11장 엘리야의 등장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믿음을 거스릴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끝까지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하는가?”에 있다. (218.1)
 4. 엘리야의 등장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경고의 기별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우리는 전체 메시지를 “영원한 복음”이라는 포괄적인 한마디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만일 옛부터 온 변함없는 복음이 아니라면 설교자는 마지막 때의 엘리야를 바르게 나타낼 수 없다. 또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권능과 진리로 설교하지 않는 것이 된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값없으시고 또 주권적인 은혜인 구원의 복음이 지니고 있는 기초적인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만일 교회가 율법의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고백하는 대로 자기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교회는 다른 모든 기별들을 판단하는 하나뿐인 하나님의 유일한 복음을 해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갈 1:6~9보라). (218.2)
 요한계시록이 여기에서 “복음”“영원한”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 엘리야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할 위험에 당면하기 때문에 요한이 이 제한조건을 덧붙인 것처럼 보인다. 바벨론과 짐승 그리고 짐승의 표에 대한 경고에 너무나 초점을 맞추는 복음은 구원하기보다는 정죄하는 것에 빠진다. (218.3)
 영원한 복음은 구원한다. 실락원에서 복락원에로의 유일한 길이 회복되어 모든 세대에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과 동일한 복음의 기별이다(사 53장). 또한 그것은 세례 요한이 전했던 하나님의 어린양과 똑같은 메시지다. 그것은 참으로 회개한 자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다고 예수께서 전하신 것과 같은 복음이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은총의 구원과 같은 복음이다. 마지막 세대가 긴급하게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그 복음이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언제나 완전하다.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계시된 자기의 뜻一엘리야의 등장一을 따르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애청을 세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곧 오실 것에 대한 모든 징조 중의 가장 큰 징조로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219.1)
 하나님께서는 자비 가운데서 우리에게 창조주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만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예배를 회복하라고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초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주의와는 반제(antithesis)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돌려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별은 그 기별을 듣는 이들 안에 믿음을 창출해낸다. 이 복음이 지금 전파된다면 왕 중의 왕으로서 그리고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금 면류관과 낫을 가지고 오시는 분과 직접 대면하는 때에 사람들을 심판에 서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219.2)
 그분께서 자기의 구원하는 은혜를 아직도 무상으로 주실 때인 현재 엘리야의 기별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진리는 결코 숫자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사실상 이스라엘 정부가 밀어주는 바알과 아세라의 850명의 선지자와 홀로 대결하였다(19절, 22절). 하나님께서는 배도의 때에 중립 노선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말씀 그리고 자기의 나라에 새롭게 헌신하라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그때야말로 우리가 담대히 일어나, 신임장과 신조가 성경, 오직 성경뿐이라고 하는 자들 즉 신실한 남은 무리 가운데데 계수되어야 할 바로 그때이다. (220.1)
 5. 모형과 실제에 있어서의 마지막 대결
 갈멜산상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 사이의 영적인 싸움은 요한계시록 16:13-16에 묘사된 선과 악의 마지막 싸움의 극적인 원형 역할을 한다. 엘리야 당시에 세 개의 다른 세력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항하여 뭉쳤다. 즉 그들은 북방 왕국의 국가 권력을 대표한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이고, 둘째로 베니게 출신의 아합의 이교도 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복방 지파에 바알 숭배를 적극적으로 퍼뜨린 자인 이세벨이다.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하였고”(왕상 18:4). 이스라엘 내에 만연해 있던 배도한 종교적 박해 세력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세벨의 명령을 순종한 전체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다(19절). (220.2)
 요한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메시야적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연합한 묵시문서적인 세 세력들을 “용”“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로 묘사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계 16:13).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에 대한 초자연족인 증오로 엮어진 이 사단의 삼위일체는 하르 마겟돈(Har Mageddon)에서 그들이 불법화시킨 한 교회에 마지막 치명타를 가하려고 세계의 모든 국가 권력들을 연합시킨다(16절). (220.3)
 어떤 학자들은 “하르 마겟돈” 혹은 “므깃도 산”을 므깃도 근처에 위치한 갈멜산과 동일시한다. 그 결과 이 하르 마겟돈을 엘리야 당시에 갈멜산 위에서 벌인 역사적 결전에 관한 묵시문학적 실체로 본다.2) (221.1)
 이 모형론적인 상관성에서 아마겟돈에서의 이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 혹은 거짓 예배 문제가 된다고 다시 한번 가르치고 있다. 이것보다 더 두드러진 평행적 사실은 최후 대결의 결과가 그 옛날 엘리야가 거둔 승리처럼 대단히 찬란한 것이라는 데 있다. 하늘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불이 갈멜산상에서 엘리야의 희생제물을 살랐을 때 누가 살아계신 하나님인가가 결판났다(왕상 18:38). 하나님의 선지자는 모든 거짓 선지자들을 사로잡아 기손 계곡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40절). 그리스도께서는 아마겟돈 전투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승리하신다. 그분이 자기의 하늘 군대를 데리고 전쟁터에 가까이 가실 때 성전(聖戰)은 신속하게 종결된다. (221.2)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 19:20. 21).
(221.3)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더 큰 위로는 엘리야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보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그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 하늘 병거가 불말을 하늘로부터 내려 그를 불멸의 영광안으로 변화시켜 데려갔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 2:11). 이 경험에서 엘리야가 받은 보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지막 세대들이 받을 보상을 표현한 예언적 모형이다. 그리스도께서 동쪽 하늘로부터 영광 중에 승리의 군마(軍馬)를 타고 돌아오실 때에, 무수한 천사들이 성도들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 아래로 옮기기 위하여 백마들을 타고 그분과 함께 온다(계 19:11-14). 이날을 위하여 그들이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사도 바울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선언하였듯이 이것을 위하여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고 고난당할가치가 있는 것이다. (222.1)
 1) White. Prophets and Kings, p. 170.

 2) E. Lohmeyer.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Tubingen. 1953). p. 137.: W. H. Shea. “The Location and Significance of Armageddon in Revelation 16:16.” AUSS 18(1980): pp. 157-162를 보라.

 (2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