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병거 제11장 엘리야의 등장
 열왕기하 23장은 바알 경배를 태양 숭배의 한 형태로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 종교제도 아래서 백성들은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면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였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는 히브리 신앙의 교의(敎義)와 바알주의를 한 종교 제도로 섞어놓은 혼합(amalgamation)이었다. 그 결과 북방의 열 지파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었다”(왕하 17:16). (213.3)
 엘리야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배도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과 그의 계명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그의 계명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계명들을 통하여 표현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213.4)
 이스라엘의 종교적 배도의 징조로서 하나님께서는 비를 거두셨다(왕상 17:1; 신 11:16, 17도 보라). 삼 년 반 동안 한 방울의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이 기간은 국가적 재난의 기간이었다. 일년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자기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고자 하여 무릎을 꿇었을 것이라고 예측해 볼수 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아합과 이세벨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고, 사람들은 무섭게 고통을 당하였다. 삼 년 반 후에 하나님께서는 배도한 지도자들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도록 엘리야를 보내셨다. (214.1)
 엘리야 당시의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고 말했다(왕상 18:17). (214.2)
 선지자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은 좇았음이라”고 대답하였다(18절). (214.3)
 참된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 하나님의 대언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결단을 내리도록 유도하기 원하였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말하였다(21절). 엘리야는 이 극적인 시간대에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다(30절). (214.4)
 여기서 우리는 바알 숭배 양태의 일면을 엿보게 된다. 바알 숭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기별이 들어있는 야훼 예배를 거부하였다(레 17:11을 보라). 엘리야는 12개의 돌을 가져다가 그 단을 재건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을 소생시켰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과 회복의 메시지가 분명히 나와있다. (214.5)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엘리야 메시지의 골자들을 담고 있었다. (215.1)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향한 믿음 안에서 진실로 회개하라고 호소하였다(요 1:29). 그들은 죄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음으로 그들이 기별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드러냈다(눅 3:3).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초림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215.2)
 마지막 때에도 마찬가지여야만 된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서 현대인들을 배도로부터 돌이키도록, 그러한 “우상숭배”가—오늘날에 어떤 복잡한 형태—물질주의 과학주의, 오컬트(occult),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거짓된 개념들一의 것이든 간에 그것들로부터 돌이키도록 불러내야만 한다. 엘리야의 기별은 한편으로는 율법주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만사 허용주의로부터, 야훼에 대한 참된 예배에로 돌아오도록, 즉 본래의 율법과 복음으로 되돌아오도록 부르는 탄원이다. 인류를 자기의 언약에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에 바라던 바가 되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율법과 복음의 체현(體現)이신 메시야 예수를 보내셨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15.3)
 3. 오늘날을 위한 엘리야의 기별
 오늘날을 위한 엘리야 기별은 요한계시록 14:6-20에 나온다. 말라기 3장에 예언된 무대는 심판이다. 요한은 다음을 보았다.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6절). (215.4)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금 면류관一왕 중의 왕으로서一을 쓰시고, 낫一심판자로서一을 가지고 오신다. 모든 선지자들이 가리킨 마지막 심판을 곧 완성하실 것이다. 이 영상적 표현은 요엘서에서 그대로 빌려 온 것이다. 요엘서는 구약성경상 압축(capsule)된 묵시문학이었다. 요엘은 야훼께서 그의 언약의 백성을 핍박한 민족들을 심판하시러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오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요엘 3:13에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이 야훼의 심판에 대한 요엘의 묵시문학을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적용하였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자기 아버지가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선언하였다(요 5:22). (216.1)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는 부르심,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는 초청 및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라는 호소를 먼저 발하지 않으시고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온다. 14장에서는 세 천사가 묵시문학적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외친다. (216.2)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기별들이 이해될 수 있도록 주셨다. 그 메시지들은 오늘날을 위한 엘리야의 기별로,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곳에 있든지, 또 그들이 어떤 신앙一로마 카톨릭교, 루터교, 감리교, 나사렛교, 재림교, 침례교, 혹은 그 외 다른 교파一을 갖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전적으로 충성하고, 참된 예배로 돌아오며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부른다. (216.3)
 우리가 추종하겠다고 공언한 교회의 명칭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구원을 줄 수 없다면 교회의 이름도 구원을 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합의 배도의 때나 세례 요한의 때처럼 교회가 엘리야의 기별 즉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계 14:12)에로 돌아오도록 부른 기별을 듣고 응답하느냐 여하에 달려 있다. (216.4)
 오늘날 엘리야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조물에 대한 숭배로부터 창조주 경배에로 되돌아오라고 부른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이 말씀은 분명히 넷째 계명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217.1)
 한 저술가는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엘리야 메시지에 있는 적시성을 이와 같은 도전적인 말로 표현하였다. “오늘날 군중들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높이고 인기있는 지도자들을 찬양하고 재물을 숭배하고 계시의 진리보다 과학의 가르침을 높임으로 바알을 따르고 있다”1) (217.2)
 심판에 대한 엄숙한 경고가 “짐승과 그의 우상들”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내려졌다. 주석가들은 이 “짐승과 그 우상”을 배도한 종교 즉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대담하게 변경시킨 종교와 동일시하였다. 천사 기별자는 엄숙하게 바벨론一배도한 종교체제一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8절)고 선언한다. (217.3)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도의 “인내”에로 되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12절). 인내는 굳게 참고 견디는 것(perseverance)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이 자주 겪는 운명인 핍박에 대면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아있으라는 호소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엘리야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실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해 주는 하나의 표가 된다고 본다. 무서운 저주가 하나님과 그의 뜻에 의도적으로 도전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다(9-11절을 보라). 하늘은 만민을 부르사 구원해 주고 거룩하게 하는 믿음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2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