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11. 침례와 최후의 만찬에서의 하나님의 확증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한하신 자비로 인하여 신성한 의식들로 행해지는 몇몇 구체적인 상징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교회의 전통에서 “성례”로 불리는 이의식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약속을 확인하고 보증하게 하신다. 성경의 성례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구속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은 기록된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들에 대해 신실하시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증가시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161.1)
 역사적으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는 그들의 교리문답이 증언하는 것처럼 성례들의 수와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개의 성례들을 인정한다. 그 교회는 “성례가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1) 놀랍게도 트렌트 종교회의(Council of Trent)는 성례가 스스로 효력을 발생하는 의식이며, 만약 죄를 지으려는 사실상의 의도가 없다면 엑스 오페레 오페라토(ex opere operato) — “이루어진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 한다고 공포했다.2) (162.1)
 개신교 신조들은 신약의 오직 두 성례들, 곧 침례와 성만찬만을 인정한다.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성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62.2)
그것들은 가시적이고, 거룩한 표요 인으로서, 그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 복음의 약속—즉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한 희생 때문에 그는 죄의 용서와 영생을 우리에게 은혜롭게 부여하신다—을 우리에게 보다 더 완전하게 드러내고 인봉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3)
(162.3)
 성경적 성례에 대한 개신교의 정의는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성경에서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재가되었다.

   (2)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성화케 하는 외적 임재의 상징이나 표시이다.

   (3) 약속된 축복에 참여하기 위해 그것은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마음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162.4)
 신약은 신성한 의식들을 복음과 그것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확고하게 결부시킨다. 성례들은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영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0:1-12에서 바울은 성례에 관한 이런 견해를 가르쳤다. 거기서 그는 옛 언약의 성례의 기능을 새 언약의 기능과 비교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침례를 받고 영적인 양식과 신령한 음료를 먹고 마셨음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1-5).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거나 혹은 불신이나 배교를 예방하지도 않았다. (163.1)
 교회의 성례들도 그와 같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6).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침례와 성만찬의 성례가 그 자체로써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함으로 그것들을 오용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이스라엘은 옛 언약이 요구한 믿음의 순종으로부터 그들의 성례들을 분리시켰다. 바울은 동일한 위험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163.2)
 기독교 침례의 성경적 의미
 기독교의 침례는 침례자 요한의 침례를 대신하고,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약속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을 때, 물 침례와 성령 침례를 결부시키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실 때 둘 다를 경험하셨다(마 3:16). 그분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은 왕이신 메시야께서 하나님의 영의 충만하심으로 기름부음 받으시고(참조 사 11:2), 그 영의 부어짐이 있는 시대를 열 것이라는 메시야적 예언들을 성취했다(참조 욜 2:28, 29). (164.1)
 오순절날 베드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 침례와 함께 하나님의 영의 침례를 베풀었다(행 2:38). 바울은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는 경험을 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관계를 확인했다. 에베소에서 물로만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성령이 그들 위에 강림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참조 행 19:1-6). 이 사건은 사도 교회에서 그리스도인 침례가 성령 침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음을 보여주었다. 이 연결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물 침례에서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164.2)
우리를 구원하시되 ∙∙∙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8).
(164.3)
 구약이 약속한 “새 언약”에서 새로움의 요소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용서와 성령의 이 연합이 었다(참조 겔 36:24-27).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조건 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 두가지 선물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참조 요 1:33; 갈 3:2, 5; 딛 3:4-7). (165.1)
 어디에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글귀보다 더 깊은 침례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165.2)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165.3)
 이 본문은 그것의 논리에 대한 주의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그것은 신자의 삶을 예수께 바치는 전통적 개념을 초월한다. 바울은 이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침례 받은 신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역사적 죽음에 실제로 참여케 하신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 받는다는 것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는 것을 의미한다(롬 6:3). 바울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다:“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4).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법적으로 그의 죽으심과 합한 것으로 간주하시는 그런 진정한 방식으로 예수의 갈바리 십자가의 경험으로 들어간다. 예수의 죽으심은 회개한 죄인들의 침례에서 그들의 죽음이 된다. 이것이 침례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이자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저주와 보복적 공의로부터 침례 받은 신자들을 자유케 하고 부활시 그들에게 영생을 보증하신다. (165.4)
 바울은 자기 자신의 침례를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는 죄에 대해 매일 죽는 것을 얘기하지 않고 자신의 침례에서 자기 죄에 대해 단번에(once for all) 죽는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강조 첨가)고 선언할 때도 이것을 표현했다. 윌리엄 G. 존슨(WilliamG. Johnsson)은 침례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166.1)
그것은 그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과 주의 십자가에 달리심에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죽었다! 그가 우리 대신 그리고 세상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의미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이 연합은 침례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침례는 예수의 죽으심에 대해 신자(모든 사람이 아님)가 동일하게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4)
(166.2)
 하나님께서는 침례 받은 신자들이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들의 죄에 대해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신다. 더 나아가 그는 죄의 권세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살리는 영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통치 아래 그들을 두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옮기사’ RSV]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 14). (167.1)
 이 구원에 대해 신자들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벧전 3:21)으로 반응한다. 바울은 침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믿음을 행사해야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로부터 자유하고 죄악의 횡포를 정복하는데도 자유롭다(골 1:14).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롬 6:4). (167.2)
 엘렌 G. 화잇은 침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6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