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를 통한 속량과 재회 제 13 장 피를 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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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히 10:21,22). (83.1)
 성경은 뿌림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뿌림을 받는다. 즉 피로서 뿌리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물로 씻어야 하는데 그것이 침례이다. 우리의 몸이 물로 씻음을 입을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의 피로 뿌림을 받는다. 그 결과는 악한 양심으로 부터의 자유이다. 피아노의 건반을 누가 두드리느냐에 따라서 그 소리의 차이를 알수 있듯이, 우리의 양심에 누가 그것을 사용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양심이 그대에게 말한다. 만일 사단이 그대의 양심의 건반을 연주한다면 그대가 괴로워할 시간을 가져야만 할때에 그것을 피하여 소홀히 하는 쉬운 길, 쉬운 시간을 줄것이다. 또는 그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과 자유를 느껴야 할 때에 근심과 걱정을 조장시켜 줄것이다. (83.2)
 오늘날 발달하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이라는 분야에서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종교는 병자들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의사들과 의료 종사원들이 종교를 믿고 있다. 환자가 카톨릭 신부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든지 불교의 승려나 창조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현대신학의 개신교 목사들이거나 방언을 말하는 오순절파 목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든지 간에 그것은 큰 차이점이 없다. 만일 환자가 그의 고뇌와 근심으로 부터 벗어나는 경험을 하면, 위궤양이나 고혈압으로 부터 회복될 수 있다. 종교는 이러한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83.3)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그러한 일을 제시하지는 않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마음에 뿌림을 받을때에만 참된 해방감이 있다. 죄책감으로 부터의 참된 자유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로서 뿌릴 때에만 가능하다. 피뿌림의 목적은 마음의 혼란에서 평정을 가지는 것, 뿐만 아니라 죄를 도말하고 사단의 노예로 부터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84.1)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그것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확신이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 신바 되었느니라”(롬 4:3).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행한 것에 말씀하신 것을 단순하게 믿는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확산을 갖게될 것이다. (84.2)
 요한은 “죄는 불법”(요일 3:4)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정의를 받아 드린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 나는 죄의 종말인 죽음에서 구원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인 죄에서 구원받고자 한다. 나는 죄의 열매에서가 아니라 죄의 뿌리를 제거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에 여러 과들에서 제단과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대와 나에게 그 피가 뿌려지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제단에 뿌려진 피, 시은소에 뿌린 피, 그 피가 우리의 가슴에 뿌려져야만 한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는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19-22). 모세는 언약의 책과 성소에 뿌렸을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들에게 뿌렸다. (84.3)
 출애굽시에 예급에서의 마지막 재앙의 때에 죽음의 천사는 온 땅을 다니며 모든 가정의 장자를 죽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한길을 제공하셨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다(히 11:28). 그 날밤 참혹한 죽음의 밤에 믿음의 아버지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뿌렸다. 그날 심판의 밤에 모든 가족들은 방안에 있었다. 피는 문에 뿌려 져야만 한다. (85.1)
 히브리서 12 장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번개와 우뢰 사이에서 율법을 반포하실 때의 시내산의 놀라운 광경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산에 오지 않는다. 대신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피는 말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 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아벨의 피는 복수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자비를 호소한다. 피 뿌림에는 이중의 기별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그것은 우리에게 죄의 참혹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가까이 가서 예수의 머리와 손 그리고 발의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게 될때에, 우리는 소리친다. “오 주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이토록 피를 흘리시나이까?” 그때 그분이 대답하시기를 “이것은 죄의 열매이다. 죄의 결과로 여기 피가 떨어지는 것이다.” (85.2)
 먼 옛날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처음의 범죄를 생각하여 보자. 하와는 금지된 나무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뱀의 목소리를 들었다. 머리를 들고 과일을 따서 그리고는 먹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말할것이다. “그까짓것 얼마나 작은 일인가!” 그러나 죄는 반역이다. 하나님의 길 대신에 자신의 길을 선택한 반역이다. 그 한 죄로 인하여 이 세상엔 아픔의 큰 수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 조그만 범죄로 고난과 수고 고뇌와 죽음의 참혹한 결과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86.1)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은 먹은 것이 그들이 행한 유일의 죄였다면 그래도 예수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되어야 했을까? 죄가 그토록 나쁜가? 그대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노한 말로 그대의 가정에 평화를 파괴했다면 그대를 용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치있을까? 정욕적인 상상이나 이기적인 야심 그리고 탐심의 죄악에서 갈바리의 십자가가 필요할 것인가? 죄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죄는 죽음을 가져오는 일이며 고통과 아픔을 가져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죄 때문에 우리들이 말하는 별 문제될것 없는 죄 때문에 저 갈바리 언덕에는 오늘도 피를 흘리는 십자가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서 있는 것이다∙ (86.2)
 술에 만취되어 있다가 깨어나서 그가 교도소에 갖혀 있는 것을 알고 그의 몽롱한 뇌 세포가 기능을 시작하자 외치기를 “내가 지금 어디 와서 있나? 왜 내가 여기 있지? 무슨 일이 있었지?” 그때 간수가 말하기를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모르오? 당신이 당신 아내를 죽였소!” “내가요? 내 아내를 죽였다고요? 아니요 결코 아니요! 나는 그녀를 사랑해요!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요” “하지만 당신은 죽였소. 지난밤에 당신은 그녀를 목을 조여 죽였소” 술기운이 점점 사라지고 제 정신이 돌아오자 그는 괴로움에 탄식하기를 “내가! 내가 나의 아내를 죽였다니! 그 술을 먹지 말았더라면! 내가 그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86.3)
 우리는 죄의 술 취함에서 부터 깨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셨다는 느낌을 가질때 까지는 평화의 말씀이나 화해는 준비되지 않는다. 확신과 회개는 용서 다음에 온다. 피 뿌림의 기별이 나의 사상을 바꾸무로 죄는 내게 있어서 더 이상 흥미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를 죽였던 것이다. 갈바리의 예수님을 바라보라, 멸시와 암흑의 자리에 달려서 돌아가신 예수님! 그분은 쓴 잔을 마시고 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고 있다. 사단이 그분을 채찍질하는 것을 바라보라 죽음의 아픈 신음소리를 들어 보라. 이것이 죄의 특성이다. 만일 그대가 죄와 더불어 산다면 예수의 죽음이 후일 그대의 죽음이 될것이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흘러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대 위에 떨어지게 하라. 그 피가 그대의 악한 양심을 깨끗게 할때에 소리지르기를 “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마귀를 따르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87.1)
 그러나 피 뿌림이 가지고 있는 두번째 기별은 그것이 죄의 흉악한 특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두셨으니”(요 3:16).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도록 그분을 내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 구원의 대속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사단의 간교한 시험을 받았는데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는다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고 유혹했다. 그는 무덤너머의 부활을 볼 수 없어서 비극의 지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분은 죄악을 도말하기 위하여 기꺼이 죽임을 당하셨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이다. (87.2)
 그분의 뿌리는 핏방울이 그대의 영혼위에 떨어질때 그대는 그 분이 죽음으로 가능케 한 용서를 의심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수백만원의 빛으로 형무소에 갖혀 있다면 그리고 한 친구가 당신을 석방하기 위하여 돈을 내어야 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그대를 석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갈바리를 바라볼때 우리는 구주의 사랑을 의심할 수 가 없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가 얼마나 흉악한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회개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죄를 슬퍼하게 되고 그리고 용서 받은 기쁨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그곳엔 무궁한 사랑의 신비가 있다. (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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