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부 예수와 옛 세대 (1:19-4:54) 제 5 장 국외자(局外者)들이 제자가 됨 (4)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독자들을 위한 교훈이 여기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우리는 계시(엘렌 화잇)에 초석을 두고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백성이지만, 과거의 계시에 집착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사업에 대하여 덜 개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다음의 위대한 계시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5:39, 40). 풍부한 계시를 가지고 있는 백성은 의도적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들이 따르기를 원하는 것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시를 적게 가진 백성은 종종 그들의 이해의 단순성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136.1)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 대한 소식을 나누기 위해 동네로 돌아간 반면에, 제자들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개방성에 의문을 품었다(27-38절). 처음으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추수 때가 다가왔고, 추수가 유대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제 사마리아인의 큰 추수가 마을로부터 일어날 것임을 일깨워 주셨다(35-39절; 참고 10:16; 12:20-22). 예수께서는 은혜롭게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술취함”(수가의 뜻)의 동네에 이틀을 머무셨다! 예수를 비평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 틀림없이 어떤 조롱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멸시받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교훈은 얼마나 귀한가! 이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같지 않다. 니고데모처럼 그들은 스스로 예수를 뵙기 위해 왔지만, 니고데모와는 다르게 표적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그분의 말씀만으로 즐겨 믿었다(41, 42절). (136.2)
 문단의 주요 주제
 표면적인 주제들
 이 매력적인 이야기의 표면에는 세 가지의 관건이 되는 주제들이 놓여 있다. 첫째는 생수의 주제로서 7:37-39에서 좀더 발전될 것이다. 둘째 주제는 성령의 개인적인 충만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를 경험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셋째 주제는 이제 선교가 규범적인 유대교 밖의 사람들에게도 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민족(民族)과 지리(地理)가 더 이상 장벽이 될 수 없다. 성령의 보편적 임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교는, 원래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처럼(창 12:1-3) 이제 우주적인 것이 되었다. (136.3)
 오는 자는 누구든지
 이 보편적인 주제는 요한복음 3:16“믿는 자마다”란 말씀에 제일 먼저 암시되어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 니고데모 사이의 현격한 대조가 그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이고, 그녀는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부자였고(19:39), 그녀는 가난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 스스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이스라엘의 “그” 선생), 그녀는 문맹자였다(제1세기 팔레스타인의 여자). 그는 경건한 바리새인이었고, 그녀는 간음한 자였다. 그는 높이 존경을 받고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사는 사마리아의 이웃에게조차 멸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명성이 높았으나, 그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으나, 그녀는 “술취함”의 성읍에 살고 있었다. (137.1)
 이와 같은 불리함과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은 훨씬 더 빨리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누구든지”에 대하여 반대되는 극단을 보게 된다. 그대가 누구이든지, 그대가 무슨 일을 행했든지, 그대가 어디에서 왔든지, 또는 그대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상관없이, 그대가 오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예수의 팔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현재 우리의 사회는 점차 다양한 경쟁 집단들로 나누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복음에는 더 이상 남자나 여자가 없고, 더 이상 종이나 자유자가 없으며,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없고, 더 이상 흑인이나 백인이 없음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갈 3:28, 29; 엡 2:11-22).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문화적 유산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을 향하여 흔쾌히 편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예수께서 오늘날 몸으로 이 세상에 계신다면, 우리의 학교와 교회에 계실까, 아니면 술집이나 감옥이나 자선병원에서, 억압받는 자들과 에이즈(AIDS)에 걸린 사람들 사이에 계실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 자신이 알기를 원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137.2)
 행동화된 비유들
 요한복음에는 사실상 비유가 없지만, 저자는 그의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더 깊은 진리들을 드러내는 행동화된 비유들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등장 인물들은 종종 더 큰 무리들의 대표자들이 된다. 침례자는 예수의 더 큰 사명과 대면하여 쇠약해 가는 그의 운동을 대표한다. 니고데모는 최선의 상태의 바리새인들-매우 진지하고 매우 학식이 높으나 가장 필요한 것을 결여하고 있는-을 대표한다. (138.1)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그녀의 동료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그를 영접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나다나엘과 요한복음 9장의 소경처럼 그녀는 참 이스라엘이다(1:47). (138.2)
 십자가와의 연관성
 이 복음서의 이 부분(2-4장)은 모두 예수의 십자가상의 경험과 이루는 많은 평행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의 이야기(2:1-11)에서 십자가와의 많은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그의 몸의 성전을 파괴할 것과 3일만에 그것을 일으킬 것을 말씀하셨다(19-21절).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이 “들림”에 대해 예언하셨다(3:14, 15). 이제 우물가의 여인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그 날 제6시에 목마름을 표현하셨다(4:6, 7; 또한 19:14, 28을 보라). 그 후에 그는 그가 무덤에서 보낸 시간과 같은 길이의 시간인 제3일까지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머무셨다(19:42; 20:1). 이 복음서의 저자는 십자가의 이야기를 끝에만 남겨두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는 독자들에게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야만 발견할 수 있는 물을 갈망하게 만들고 있다. (138.3)
 ■ 말씀에 들어감
 요한복음 4:43-54을 적어도 두 번 읽은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139.1)
 1.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의 귀향을 환영한 것은 무슨 동기 때문이었는가? 그들의 태도는 같은 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인들 및 요한복음 2:23-25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태도와 어떻게 대비되는가? (139.2)
 2. 그대는 예수께서 백성들로부터 받은 환영과 44절과 48절에서 그가 하신 말씀 사이의 대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139.3)
 3. 4:46-54의 기적적인 표적은 예수에 대해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가? 한두 단락으로 대답해 보라. (139.4)
 ■ 말씀을 탐구함